부여의 낙화암에 가면 가슴이 아려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아가고 있던 백제 사람들이 생각지도 않은 중국의 대군을 만나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망해야 했던 뼈아픈 역사의 끄트머리를 낙화암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에는 나라가 망할 징조가 없었다.
의자왕은 해동성자의 칭호를 받을 만큼 성군이었고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다만 신라가 옆에 있었고 신라의 외교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당나라 군대 13만은 백제와 신라의 군대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 거대한 힘을 빌린 신라에게 패한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신라 출신이 기록한 역사다. 그들은 사학자도 아닌 시문에 능한 문인이었다.
나라가 망하려면 망할 징조를 찾아야 하는데 당시에 백제에는 나라가 망할 징조가 없었다.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신라에 의해 중과부적으로 억지로 망한 것이다. 그것을 사실대로 기록하기에는 떳떳하지 못하였던지 여러 가지 주술적인 기이한 일들을 망할 징조라고 기록하여 놓았다.
여우 떼가 궁중으로 몰려왔는데 그중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자리에 올라앉았고 큰 물고기가 죽었는데 세 발이나 되었다든가. 장마로 여자 시체가 생초에 싸여 떠내려 왔는데 18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궁궐 홰나무에서 사람 곡하는 소리가 들리고 궁궐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백강이 핏빛이 되었으며 밤이면 귀신이 나타나 ‘백제는 망한다’고 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모두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신라가 백제의 귀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당나라에까지 가서 당나라 군대를 불러다가 백제로 쳐들어 왔다는 것이다.
침공의 이유치고는 유치하기 그지없다.
삼천궁녀 이야기는 통일신라시대에도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통일신라 때에 어딘가에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 때에 와서 김춘추의 후손인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의자왕의 방탕을 나라 망할 이유로 들먹이기 위하여 지어낸 이야기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부여에서 삼천궁녀가 살만한 터가 없다. 삼천궁녀가 거주하려면 그만한 집을 지었을 것인데 그만큼 넓은 거주지가 없다.

낙화암 위쪽 부소산 정상에 서 있는 사자루
부여 사람들은 말한다.
삼천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백제의 일반 여인들이었다고.
나라가 망하자 일반 여인들이 점령군에게 당할 수치를 생각하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것이라고.

삼천궁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낙화암은 말이 없다
삼천궁녀 이야기는 엉뚱하게도 1954년 손로원이 가사를 쓰고 한복남이 작곡하여 허민이 부른 가요 ‘백마강’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어 사실처럼 굳어지게 되었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수천 년의 애환을 담고 말없이 흐르고 있는 백마강
백마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른다.
이 강은 마한시대 이전부터 흐르던 강이다. 삼천궁녀가 누구였는지 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은 말이 없다.
아서라. 그런 일 가지고 다투지도 싸우지도 말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마저 굳게 다물고 백마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강의 침묵 속에서 추측만 천갈래 만 갈래로 퍼져나갈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