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와 장수 현감 최경회 부부의 남강 투신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엔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노래가 1절이 끝나면 멋진 대사가 흘러나온다.
“진주라 천 리 길을 어이 왔던가?
연자방아 돌고 돌아 세월은 흘러가고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도 늙었세라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젊어가는 옛 추억
아~ 손을 잡고 헤어지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구나.”
1941년에 나온 이 노래는 이가실이 노랫말을 쓰고 이면상이 작곡을 했으며 가수 이규남이 불러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다. 해방 후 월북 작가의 노래라 하여 금지곡이 되었다가 후에 해금이 되어 다시 불러지게 되었다.

진주의 촉석루에는 전북인들과 관련돤 사람들이 많다
진주라 하면 진주성의 촉석루가 생각나고 촉석루라 하면 논개가 생각난다.
논개가 몸을 던진 곳은 촉석루 앞의 남강이었다.
그러나 진주성 촉석루 남강에 몸을 던진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었으니 그가 바로 논개의 남편인 장수 현감 최경회다.
최경회는 진주성 1차 싸움에서도 끝까지 투쟁하여 진주성을 지켜온 사람이다. 그러나 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1차 때의 3배인 9만의 왜군이 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퍼부어 결국은 패하고 말았다.
그때 끝까지 성을 지키던 최경회는 남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만다. 최경회가 죽고 나서 왜군들이 진주성 승리의 잔치를 할 때에 조선의 기생이라며 나타난 사람이 논개였고 결국은 왜장의 몸을 끌어안고 남강 속으로 투신하고 만다. 남편인 최경회의 뒤를 따라간 것이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
논개와 최경회의 인연은 전라북도 장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논개는 신안 주 씨 양반 가문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가세가 기울어 살림 형편이 어렵게 되었는데 삼촌이 논개를 어느 집의 민며느리로 보낼 것을 계획하자 어머니와 함께 달아났다. 결국 관가에 체포되어 왔는데 당시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가 부인이 병상에 누워있는데 논개에게 병간호를 부탁하게 되었다. 부인이 죽으면서 논개를 부인으로 맞이할 것을 부탁하여 논개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의병을 조직하여 1차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운다. 그 공로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1차 진주성 싸움에서 3만의 군사를 투입했던 왜군은 2차 싸움에서는 9만 명으로 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9일 동안 성을 사수하였으나 폭우로 성의 한쪽이 무너지면서 왜군이 밀려들어와 패하고 말았다.
끝까지 분투했던 최경회는 남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고 이에 논개는 진주관가에 기생의 이름을 올리고 왜군의 승리 기념 잔치에 끼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왜장 게야무라 노쿠그케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어 원수를 갚는다.
일본인은 간사하다.
이런 논개를 논개가 끌어 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이 왜장과 애인 관계였으며 같이 놀다가 실수로 미끄러져 물속으로 빠져죽었다고 우기는 것이다.
1970년대에 일본인 우에즈카 히로우가 승려를 가장해 한국에 들어와 한일 친선을 위하는 일이라며 진주시장에게서 논개의 위패를 기증받아 일본에 가서 "왜장을 사랑한 조선의 기생"으로 둔갑을 시킨 것이다.
진주성 싸움에서는 논개와 최경회만 참가한 것이 아니다.
황진이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던 여류시인 부안의 매창이 관련이 된다. 매창을 사랑했던 유희경이 의병을 조직하여 진주성 싸움으로 나가게 되어 매창과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

유희경을 그리며 쓴 매창의 시비
유희경이 진주성 싸움으로 달려간 후 소식이 없자 임을 향한 매창의 시가 무르익어간다. 매창은 유희경을 만나 시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희경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워 서출이었던 신분을 양반의 신분으로 올리고 높은 벼슬까지 한 사람이다.
진주성 싸움에서는 논개를 비롯한 최경회, 유희경 등 전라북도에서 달려간 사람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피와 땀으로 진주성이 더욱 빛났던 것이다. 어디를 가던 전북인은 진가를 발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