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사람으로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李木臺)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금 더 아는 사람은 팔복동의 추천대를 알고 서곡지구 황방산의 문학대를 알 것이다.
그럼 그밖에는 없을까? 더 있다. 전주 구도심과 신시가지를 가르고 있는 기다란 화산 등성이에 황학대와 유연대가 있고 낙수정을 향하여 올라가는 천주교 전주교구가 들어서 있는 간납대도 있다. 남고산성에는 마치 장난스럽게 지어놓은 것 같은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가 있다.
전주에는 알려진 언덕만도 십여 개가 된다.
전주에 이런 유명한 언덕이 있다는 것을 까마득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옆구리를 쳐주는 사람이 알려 주었다.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이다.
“형님, 전주에 대(臺) 자가 들어가는 곳이 몇 개나 될까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고 간납대도 있더구만.”
“땡! 절반도 못 맞췄습니다.”
“으잉! 그렇게 많아?”
대(臺)는 흙을 높이 쌓은 곳을 의미한다. 일부러 쌓지 않았더라도 주변보다 다소 높은 언덕을 말한다.
주변에 비해 높은 곳이기 때문에 풍경이나 정세를 관망하기 좋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정자도 짓고 기념비도 세우고 성도 쌓아놓았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가 되기도 하고 중요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오목대에 있는 고종 황제의 친필 유지비
오목대(梧木臺)
오목대는 전주 교동에 자리 잡아 전주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전주이 씨였던 이성계가 고려말에 운봉의 황산 싸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본향인 전주에 들러 승전 잔치를 크게 벌였던 곳이다.
그 자리에서 한 나라를 세운 한고조가 읊었던 대풍가를 장황하게 읊어서 장차 새 나라를 세울 것을 암시하던 자리다.
이때 함께 있었던 포은 정몽주가 고려가 망하겠구나 하는 심정이 들어 말을 달려 찾아간 곳이 남고산성 만경대다. 그는 이곳 바위에 그때의 심정을 담은 시를 새겨 놓았다.
전쟁터에 정몽주 같은선비가 왜 같이 왔을까?
많은 군대가 출정을 할 때는 왕실에서 그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을 경계하기 위하여 믿을만한 사람을 딸려 보낸다. 왕족들이 따라가기도 하고 대신 중에서 따라가기도 한다. 이성계가 운봉으로 출정할 때에 정몽주를 딸려 보낸 것이다.
오목대에는 고종이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 새겨진 비문과 비각이 있다.
본래 오목대와 이목대는 한 줄기였다. 일제가 전주이 씨 발원지의 기운을 끊기 위하여 억지로 철길을 내고 잘라놓았다. 그리고 한벽루 아래로 굴을 뚫어 기차가 지나가게 하여 쿵쿵 울리게 해놓았다. 참 나쁜 사람들이다.
만경대(萬景臺)
만경대는 후백제의 견훤이 전주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만든 남고산성의 망루다. 이곳에는 15세기 김종직을 비롯하여 김시습, 김수항 등 많은 인사들이 이곳에 올라 각자의 감회를 노래했다.
여러 시들 중에 전라관찰사로 있는 동안 만경대에 올라 답청을 했던 오시수의 시는 잔잔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집안에서 3대가 관찰사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남고산성에는 만경대 외에 천경대와 억경대가 있다.

만경대에서 바라보면 전주 시내가 다 보인다
천경대(千景臺)와 억경대(億景臺)
남고산성 망루 중의 하나다. 천경대는 만경대에 비해 보이는 풍경의 시야가 좁아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한다. 이에 비해 억경대는 만경대보다 높은 지역이어서 보이는 풍경이 더 많아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모두가 남고산성을 수비하는 망루다.
이목대(李木臺)
이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 이안사가 살던 곳이다. 전주 이 씨 발원지라 하여 발리산이라고도 부른다. 이목대에서 사람들이 살던 곳은 지금도 있는 자만동(濨滿洞)인데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산동네가 아니다. 옛날에는 집터를 잡을 때 허허벌판에다 잡지 않았다. 산의 정기를 받은 명당을 잡다 보니 산을 끼는 곳이어야 했다. 자만동이나 옥류동은 예로부터 전주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아왔던 명당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전주의 발원지인 자만동의 기운이 더 이상 벋어나가지 못하도록 바로 앞으로 철길을 내어 기운을 잠재웠다. 철길이 나기 전에는 자만동에서 향교로 이어지는 마을이 교동으로 이어져 있었다. 전주의 뼈대 있는 사람들이 교동에 자리 잡고 살았다.
지금 이목대에는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석이 있고 일반 백성들의 출입을 금하는 자만동금표(濨滿洞禁標)가 남아 있다.
추천대(楸川臺)
추천대(楸川臺)는 전주시 팔복동에서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 추천이 되는 강 언덕을 말한다. 이곳은 이미 조선 시대에 정자를 지어 추천대라 이름 붙였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천대는 전주천의 끝부분인 추천을 바라보는 지점에 있다
추천대에 있는 정자는 조선 성종 때 병조참판, 대사헌을 지낸 이경동(李瓊仝)이 고향에 돌아와 전주천과 이어진 추천(楸川)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만년을 보내던 곳이다. 이경동은 세조 8년(1462)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인물이다.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 후손 이정호(李正鎬)가 이경동의 발자취가 서린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세우고 추천대(楸川臺)라 이름 지었다.
문학대(文學臺)
전주시 효자동 서곡지구에 있는 문학대는 황방산 아래 마전 들판을 바라보는 지점에 있는 언덕을 말한다.
고려 말의 학자 황강(黃岡) 이문정(李文挺)이 낙향하여 만년을 보낸 곳이다. 1357년(공민왕 6)에 문학대 정자가 건립되었는데 전라북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이문정은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서 성리학을 강론하며 많은 후학과 인재를 길러냈다.

문학대는 황방산 줄기에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그는 당시 숭유억불로 말미암은 갖가지 폐단을 상소하여 이를 바로잡게 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문학대는 임진왜란 때 훼손되어 한 동안 터만 남아 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1824년(순조 24)에 후손들이 마을 앞산인 이곳 마전마을에 중건한 것이다.
문학대가 있는 마전마을에는 이문정의 후손들이 600년간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부근에 문학초등학교가 있다.
간납대
이곳은 전에 전주영생중•고등학교가 서 있던 자리다. 후에 지금의 전주대학교 전신인 영생대학이 생겼고 영생교회도 있었다. 지금은 천주교 전주교구가 있다.
황학대(黃鶴臺)
황학대는 신흥중•고등학교와 기전여고 부근의 산자락 절벽 위를 말한다.
2,000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황금색의 학이 놀다가 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지금은 옛 황학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바위에 황학이라는 글자만 보인다.
주변에 개화기 때에 전라북도의 교육을 주도했고 일제강점기 때에 독립사상을 주지시켰던 민족학교인 신흥중•고등학교와 기전여고가 있다.
부근에 있는 선충사는 선조 31년의 노량해전에서 꽃다운 나이 28세로 전사하여 남해의 수호신이 된 이영남 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이영남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옥포해전의 선병장으로 크게 활약했던 장군이다.
유연대(油然臺)
예수병원에서 중화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선너머라고 한다. 이 말은 화산서원 너머에 있는 동네라 해서 선너머가 되었다.
선너머에서 진북사에 이르는 능선을 타고 가다보면 진북사가 있는 호암산에 이른다. 호암산 능선 잔등을 유연대(油然臺)라 부른다.
유연대 아래에 진북사가 있다.
경사가 심한 산 중턱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진북사는 예전에 북고사라 불르던 전주의 북쪽을 수로하던 곳이었다. 속칭 부엉바위 절로도 불렀다.
전주의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동고사, 서고사, 남고사, 북고사 중 하나다.
유연대 아래에는 어은동(魚隱洞)이라 불렀던 어은골이 있다. 물이 깊고 그늘지어 고기들이 숨어 놀기에 좋다는 곳이다. 서해 바다의 고깃배가 고기를 싣고 어은골까지 왕래를 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언덕이 두 개가 빠졌소,”
“저런? 그곳이 어디인가?”
“송천대하고 인후대요.”
그곳은 또 어디인가?“
”그야 형님이 자주 가는 인후동 언덕이고 제가 자주 가는 송천동 언덕이지요.“
이제야 감이 잡힌다. 그래 나하고 천 선생하고 자주 다니던 인후동 언덕과 송천동 언덕도 우리들에게는 중요한 언덕이지.
유쾌한 공상에 빠져보기도 하는 오늘을 참 좋은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