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情熱)을 다 불태우지 못한 우리 고장 시인 정열(鄭烈)

어머니의 한과 절망을 함께 울었던 시인

작성일 : 2023-12-05 08:19 수정일 : 2023-12-05 09:49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정열(情熱)을 다 불태우지 못한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마는 이름까지 정열이라 했으면서도 정열을 불태우지 못하고 한과 절망을 속울음으로 풀어낸 시인이 우리 전라북도에 있다.

그가 바로 정읍 출신 시인 정열(鄭烈)이다.

 

시인 정열(鄭烈)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2년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교촌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정열 시인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정읍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선생님이고 시를 쓰고 농사일도 한 향토 시인이다.

정열 시인은 석유 등잔 호롱불 밑에서 밤이 깊도록 시를 쓰면서 자신에 대한 외부의 평가와 관계없이 오로지 시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정열 시인은 동진강이 흐르는 정읍의 너른 들판에서 5대째 살아왔고 삼대독자 가문에서 편안하게 잘살고 있었다.

문제는 한국전쟁.

한국전쟁 때 오직 한 분밖에 없었던 형님을 빼앗긴 분노와 슬픔이 온 가족을 짓눌렀고 이로 인하여 한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정열은 문학의 세계에서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을 것이다.

 

정열 시인의 원래 이름은 정하열(鄭夏烈)’이었다. ‘정열(鄭烈)’은 그의 필명이다. 그는 이름 중 가운데 자를 생략하고 정열로 필명을 쓰기 시작하였다.

1956년에 발행한 <문학예술>에도 이 필명으로 작품이 발표되었다.

 

나의 시는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 영영 풀리지 못한 채 응어리진 핏덩이거나, 한밤중에 반딧불이 같은 호롱불 앞에서 반쯤 석불(石佛)이 되어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던 어머니의 속울음이다.”

정열 시인의 말처럼 평생 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삶 자체가 커다란 고통이고 번민의 연속이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한과 슬픔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살았던 아픈 삶이었다.

정열 시인이 살았던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든 갑오 농민운동의 한복판이었으니 때로는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부조리를 바라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시를 통하여 했던 시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정열 시인의 문학은 이렇듯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정읍과 관련이 있다. 시인이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한 것은 1948년 전주상고에서 문예부장을 맡으면서부터다. 1962년 국문과를 졸업하고, 1955문학예술, 이듬해 묵도(默禱)로 추천을 받았고, 1959사상계얼굴, 무화과,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는 원뢰(遠雷)(1961), 바람들의 세상(1976), 어느 흉년에(공저, 1982)가 있고, 시선집으로는 할 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1985)가 있다.

 

 정열 시인의 시집

 

정열 시인은 1953자유신문에 그의 작품이 당선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1955년부터 문학예술이라는 잡지에 박남수, 조지훈 등의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3회 추천을 받아야 등단하게 되어 있어서 시인은 3회 추천 작품과 당선 소감문까지 출판사로 보냈지만, 공교롭게도 문학예술이 폐간되는 바람에 등단하지 못했다.

시인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5911월호 사상계에 시 당선으로 화려하게 등단하였다. 당시 문학예술조지훈 시인의 추천을 받은 묵도(默禱)라는 시를 살펴보자.

 

여기는

() 우에 뜬 연잎보다 좁은

섬이 아닙니까

 

천년을 두고 달려도 달려도

해안선이 보이지 않은 뻘밭이 아닙니까.

 

성좌(星座)로도 이름을 다 헤아릴 수 없는

목숨들이

얼마나 미움을 향하여

꽃을 흔들다가 쓰러져 간 수자리입니까

 

여기는 병() 속이 아닙니까

 

시시로 바람같이 이는 당신의 한숨과

나의 오열(嗚咽)

푸른 침묵으로 휩싸는 병() 속이 아닙니까

-<중략>-

한해......두해......서른해

이루 다해도 모자라는 평생을 두고

가시가 돋는 인종(忍從)의 징역살이를

 

말 없는 기도의 푸른 향연(香煙)이 피어오를 것입니다.

달밤 해바라기와 같이

안으로 웃어 누르는 기도(祈禱)

 

 김제 시민 공원에 세워져 있는 정열 시인의 시비

 

이 시에는 우리의 불행한 역사 속에서 서로 대립하다가 쓰러져 간 곳에서 참회하고 거듭나야 함을 염원하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이 땅에 얼룩진 오욕(汚辱)의 역사를 잊지 않으면서 새로운 꿈을 이루고자 하였다.

 

정열(鄭㤠) 시인의 작품 경향을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이 속울음의 시인이라는 말이었다. 어떤 사람은 시인이 한평생 고향을 지키면서 시작 활동을 했다 하여 농민 시인또는 전원 시인이라고 하기도 하고 내면의 한을 표출한 민중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시인은 외부의 어떤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시의 세계를 구축해 온 사람이다. 

 

정읍 출신으로 우리 고장 현대시의 꽃을 피운 정열(鄭烈) 시인의 시비가 김제 시민공원에 있고 그의 시 바람 소리가 새겨져 있다.

 

 

대낮에도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은

내게는 괴로운 일이다.

다정한 사람과

주고받는 조용한 속삭임 사이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다.

한밤중 나 혼자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면

스스로의 육신을 불태우고

텅 비인 가슴속 깊은 어둠 속에서

영혼이 일렁이는 속울음 같은

나이 들수록

바람 소리가 무섭다.

 

 

정열 시인의 시에 대하여 박남수 시인은 개인의 내면적 표현을 위한 서정의 언어, 인식과 감각의 결합을 극대화한 실험이라고 평가하였고, 신적정 시인은 다가올 내일이 우리의 해어진 옷자락을 헛되이 스쳐 갈 바람결이 아닐진대, 십 년을 닥달한 멍든 역사의 한 자락을 넘기는데 서슴없다라고 했으며, 정양 시인은 가난, 전쟁, 분노, 병마 등, 사회악의 부정에서 오는 좌절감을 노래했다고 했다.

그는 고향에 살면서 신태인종합고등학교 교사로 일생을 마쳤다. 신태인종합고등학교 재직 당시 주봉구 시인을 가르쳤다고 한다.

 

정열(鄭㤠) 시인은 석정문학회에 가입하여 전북 문단의 시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김제문학회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시 바람 소리가 새겨진 시비가 김제 시민공원에 있다. 정열(鄭㤠) 시인! 그는 선대가 물려준 고향에서 우리 문학을 풍성하게 일궈냈다. 그의 고향, 정읍에서 외롭게 문학의 길을 지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을 노래한 시 에서처럼 정열 시인은 지금도 고향인 정읍에서 비를 맞으며 고향을 지키고 있다.

 

서래봉도

내장산도

이 땅의 산하는

모두 비에 젖는다.

 

백제의 마지막 여인

속울음이 굳어간 망부석도,

녹두장군의 피진 고함소리도,

부처님께 염불하시는 노스님도,

우산을 받은 가난한 시민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거지도

모두 모두 다 비를 맞는다.

 

안방에도 비가 내리고

뜨락에도 비가 내리고

벌판에도 비기 내리고

강에도 비가 내리고

비는 검푸른 바다로 일어서서

젖은 땅을 또다시 두루 덮는다.

 

세상이

몇 번이나 석 바뀌어야

이 산하에 비가 그칠까...

이 땅에는

그냥 비가 내린다.”

 

 

 

 
이용만 기자 ym60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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