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예수병원 뒤 화산의 선충사(宣忠祠)를 찾아
전주시 중화산동 예수병원 뒷길 화산 자락에는 선충사(宣忠祠)라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한 젊은 장군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그가 바로 이영남(李英男)[1571~1598]이다.
영화 “노량해전”에서는 이영남이 위험에 빠진 이순신을 구하려다가 치명상을 입고 죽게 되는데 이순신이 손수 자기의 갑옷을 벗어 이영남을 덮어주고 갑옷 없이 맨몸으로 싸우다가 전사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그만큼 이영남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중요한 인물이었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흠모하던 이순신 수하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충성하였고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했다.

임진왜란 때의 사람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영남의 초상화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수군에는 이영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럿 있었다. 난중일기에도 이영남이라 기록된 것이 60여 회나 된다.
그래서인지 이영남 장군의 출생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전북에서는 이영남이 전주성 남문 밖 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그곳에 묘소가 있고 전주에 사당이 있다.
그런가 하면 충청북도에서는 진천군 덕산읍 기전리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며 이곳에 이영남 장군 묘가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에 있는 이영남의 묘
두 곳 다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두 곳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임진왜란 당시에 수군에 있었는데 어느 이영남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인지 뚜렷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영남의 본관이 전의(全義) 이 씨라고 알고 있는데 양성 이 씨 종중에서는 이영남이 양성 이 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영남에 대한 글 중 시인 이병초의 역사소설 『노량의 바다』가 있다.
이병초 시인은 전주에 있는 선충사를 찾았다가 이영남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 이를 소설화하기로 마음 먹는다. 특히 이영남이 죽은 지 200년이 지난 순조 6년인 1806년에 송상열 등 전라도 유생 75명이 상소를 올려 이영남을 기리도록 한 것에 감동을 받는다.
그 책이 『노량의 바다』다.
소설 속에서 이영남의 고향이 전주라 하였으며 전주의 여러 풍광이 유려하게 펼쳐지고 그가 무예를 닦았던 모악산도 묘사되어 있다.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산화(散華)했던 병사들의 대부분이 흰옷 입은 백성의 아들이었다는 점도 부각시키고 있다.
1959년 건립한 충무사 앞 오른쪽 동무(東廡)에는 이영남이 가리포진 56대 첨사였으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순국한 이영남(李英男, 1563~1598) 의 신위가 같이 모셔져 있다.
전주 화산에 있는 선충사에는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을 들어서면 첫 번째 문인 장의문을 통과해야 한다. 의에 기대는 문, 의를 무기로 삼는 문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 문은 자명문이다. 스스로 밝아진다는 뜻이다. 그래야 사당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엄숙한 곳이니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오라는 묵시인 것이다.
이영남은 사후인 1605년(선조 38)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선무원종공신에서 1등으로 추대되었다. 그후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영남의 후손가에 전해지는 준호구에도 절충장군행중추부사(折衝將軍行中樞府事)로 되어 있다. 1807년(순조 7년)에 전라도유학 송상설(宋相說) 등의 상소로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의금부훈련원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練院事)에 증직되었다. 그 교지가 지금 남아 있다.
후손들이 1970년에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에 있는 선충사(宣忠詞)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이영남 장군은 선조 17년인 1577년에 별시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옥포해전, 한산대첩, 명량해전 등 이순신 장군과 함께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1598년 가리포첨사(加里捕僉使)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3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선조 38년(1605) 절충장군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녹훈되었다.
2004년 방영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마지막 회에서 이영남이 죽어가면서 이순신에게 유언처럼 한 말이 있다.
“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분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장군이셨습니다.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분도 장군이셨습니다. 진정으로 장군을 닮고 싶었습니다.”
이영남은 위험에 빠진 이순신을 구하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에게 치명상을 입고 위기에 빠졌다가 구출되어 위의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이순신 장군은 그의 눈을 감겨주며 자신의 갑옷을 벗어 이영남에게 덮어준다. 그리고 갑옷을 입지 않은 채로 싸우다 이영남의 뒤를 따라 전사한다.
충무사 동무에는 봉안된 이영남 장군 영정과 신위가 있고 후손들이 국립 전주박물관에 기증한 초상화가 있다.
이영남 장군에게 병조판서를 증직(贈職)하면서 내린 교지와 부인에게 함께 내려진 정부인 교지가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완도에는 이순신 시신이 안치되었던 월송대와 이순신과 이영남을 모시는 충무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순신과 이영남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순신 장군은 목포의 고하도에서 강진현의 고금도로 진을 옮기고 시름에 잠겨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장군, 가리포진 첨사 이영남입니다. 장군을 생각하여 얼마 전 담근 백일주가 잘 익어서 조금 가져왔습니다. 시위를 당기시기 전 목이라도 축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 참으로 고맙네..."
평소 휘하의 참모들과 술을 즐겨 마시던 장군은 가리포 첨사 이영남이 건네준 술을 마시려는 순간 눈을 뜨니 꿈이었다.
이순신도 이영남을 늘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일화라 할 수 있다.
이영남의 본관은 전의(全義) 이 씨이고 자는 자호(子豪), 호는 효악(效岳)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역임한 이창수(李昌壽)다. 할아버지는 판결사에 증직받은 이익충(李益忠)이고, 아버지는 이정효(李貞孝)다.
이영남은 이상진(李尙眞)이 작성한 『묘지문(墓誌文)』에 따르면 1588년(선조 21)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이 발생하던 1592년에는 경상우수영 소속이었던 소비포권권(所非浦權管)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비포권관은 종 9품직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항포해전 당시 이영남은 훈련판관겸소비포권관으로 되어 있다. 훈련원판관은 종4품직이므로 임진왜란 당시 이영남의 품계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소비포권관으로 있던 이영남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일본 해군이 남해안으로 진출하자 이순신을 찾아가 출전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출전하여 원균, 이영남 등과 함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596년에는 장흥부사가 되었다가 1597년에 파직되었다. 이후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가 되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이영남(李英男)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에는 27세의 나이로 경상우수영에 부임하여 경상우수사 원균 휘하의 율포만호로 있었다.
그는 원균의 전속부관격 인물로 원균을 잘 보좌하여 신임을 얻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원균이 이순신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좀처럼 출전하지 않는 이순신을 자신이 직접 전라좌수영으로 건너가 이순신에게 지원 확답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영남은 원균 수하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는 원균과 달리 이영남은 설득하면 이해하는 타입이었다. 원균이 부하가 죽든 말든 무조건 돌격을 외치는 것에 대하여 책임감이 강하고 전우를 아끼는 모습을 보이며, 원균이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려 전공에만 집중하고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졸장부 작전을 반복하자 점점 불만이 쌓이더니 결국 아끼던 부하가 전사하자 원균과 충돌하기도 했다. 심지어 윤두수의 꼬드김을 받고 이순신의 지휘권을 박탈하려는 원균에 맞서기도 하였다. 어차피 죽을 몸 왜놈과 싸우다 죽으리라 마음먹고 여러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공을 세웠다.

전주 남쪽 구이면에 있는 이영남의 묘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또 한 번 충돌한 끝에 결국 사직서를 쓰고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찾아간다.
이후 소비포권관으로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대첩 등 10여 차례의 해전에서 충무공을 보좌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해전에서 승승장구한 이영남은 1595년 임기를 마치고 태안군수 강계부판관 장흥부사를 역임하였다.
정유재란이 나자 이영남은 이순신의 수하에서 그를 돕는다.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1598년 제56대 가리포첨사 겸 조방장으로 임명된 이영남은 조수에 익숙한 완도 장정들을 고금진에 소집하여 훈련시켜 수군을 정비하여 1598년 11월 19일 최후의 노량해전에 출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35세로 충무공과 함께 순국하였다. 당시 줄곧 수행한 노복 일학이 영구를 모시고 돌아와 다음 해(1599년) 봄에 이곳 갈현산 선영하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순국 후 선무운종공신 일등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충무사에는 위패와 영정이 충무공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