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나는 전주 출신 기인 경허 스님

선의 생활화를 모색한 선각자

작성일 : 2024-04-01 20:00 수정일 : 2024-04-02 09:40 작성자 : 이용만 기자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려하는데 갈 길은 멀었다.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지쳐서 걸음이 더 느려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밤중에나 절에 도착하게 될 것이었다.

 

이들과 함께 걷던 경허 스님이 갑자기 축지법을 써서 빠르게 가자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을의 우물로 갔다. 마침 여인들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어느 여인이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주었다. 그런데 경허 스님은 물은 안 마시고 갑자기 여인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이었다.

저 미친 중놈 잡아라!”

깜짝 놀란 여인들이 소리를 치자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쫓아나왔다.

중들은 죽어라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절이 있는 산 아래에 도착해 있었다.

 

한숨을 돌린 중들이 경허 스님에게 그게 무슨 짓이냐고 핀잔을 퍼부었다. 그때 경허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해지기 전에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느냐? 이것이 바로 축지법이다.”

 

조선 중기 휴정 스님 이래 가장 탁월한 승려로 평가받고 있는 경허(鏡虛) 스님은 1846(헌종 19)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애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무애행(無碍行)이란 어떤 일에 막힘없이 마음 가는 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전주 출신 경허 스님은 조선 말기 가장 탁월한 스님이었다

 

경허 스님은 조선 말기, 헌종 15년인 1849년에 태어나 1912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선()의 생활화와 일상화를 모색하였으며 근대 선의 물결이 다시 일어나는 계기를 만든 사람이다. 본관은 여산이며 속성은 송씨(宋氏), 속명은 동욱(東旭), 경허는 법명이다. 성우(惺牛)라고도 한다.

 

열다섯 살에 계룡산 동학사 강원에 들어가 23세까지 대강백이었던 만화보선에게 불교 경전을 배웠다.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유명한 학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도가사상과 유가를 공부했다. 그 결과 23세부터 34세에 이르기까지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만해 한용운은 이 무렵의 경허 스님에 대해 <경허약보>에 이렇게 적고 있다.

"경허는 공부를 하는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해도 남보다 앞섰으며 내외전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팔도에 이름을 떨쳤다."

 

9살 때 과천의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계허(桂虛) 스님 밑에 있다가, 동학사의 원오(圓悟) 스님에게서 경학을 배웠다. 1871년 동학사의 강사가 되었으며, 1879년 돌림병이 유행하는 마을을 지나다가 죽음의 위협을 겪고 문득 깨달음을 얻어, 수련생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문을 닫고 좌선하여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32세에 홍주 천장사에서 혜언(慧彦)의 법을 잇고, 그 후로 많은 기행으로 여러 일화를 남겼다.

 

1894년 동래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에는 합천 해인사에서 인경불사, 수선사 등의 불사를 주관했다. 이후 지리산 천은사, 안변 석왕사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갑산, 강계 등지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쓴 모습으로 박난주(朴蘭州)라는 이름으로 살기도 했다.  

1912425일 임종계를 남기고 입적했다. 저서로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집 앞부분에는 그의 어린 시절 가난해서 힘들었던 이야기와 절에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해 동학사의 강원에서 강사가 되어 살던 이야기가 있다.

해인사 조실 스님이 되어 큰 스님으로 대접받고 잘 살 수 있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그 직을 버리고 세상을 떠돌면서 기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말년에는 삼수갑산에서 훈장을 한 이야기는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에 묘사되어 있다.

 

경허는 기인이었다.

스님으로서 말술을 마셨고 불교의 계율에서 자유롭게 행동했다. 그리고 많은 시를 써서 경허집에 남겼다.

경허 스님은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 화엄경을 뜯어 문을 바르고 벽을 도배하기도 했고, 문둥병 걸린 여인과 합숙을 하는가 하면, 어머니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는 등 파격적인 행동을 보인 일화가 많다. 한 평도 채 안 되는 선방에서 모기며 빈대, 구렁이가 몸을 휘감고 지나가도 상관치 않고 참선에 몰두하여 득도를 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연정을 품었던 여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버리자 그 집으로 찾아가 머슴이 되어 남의 집 며느리가 된 연인과 내통을 하다가 몰매를 맞아 초주검이 되기도 했다.

 

경허 스님, 그는 파계승처럼 고기를 먹기도 하고 술병을 옆에 끼고 거침없는 무애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재물 욕심 없이 누더기옷 한 벌로 저잣거리의 민중들 사이에서 청빈한 삶을 살다 간 한국 선문(禪門)의 달마라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이다.

 

경허 스님을 막힘이 없는 선()의 달인이라고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계율을 깨고 술과 담배, 고기조차 가리지 않고 먹어가며 기행을 일삼은 이단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선불교를 중흥시킨 대선사라기보다는 불교계에 악영향을 주었던 삿된 스님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계율을 어겨 주색과 고기 먹기를 꺼리지 않는 후대의 일부 스님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경허 스님은 그 재능과 함께 천성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겉으로 구차스러운 꾸밈이 없었다.

한암 스님은 다음과 같이 경허 스님을 언급하고 있다.

경허 스님은 세간의 이익과 손해, 애증, 헐뜯음과 찬양,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초월하시어 큰 산과 같이 부동하시었다. 가고 싶으시면 가고 머물고 싶으시면 머무시어 타인의 눈치를 보아 우회하는 일이 없으신 분이었다. 이러한 탓에 먹고 마심을 자유롭게 하고 노래와 춤을 맘대로 하는 등 거침없이 행동함으로써 남의 의심과 비방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비판에 개의치 않았다. 

 

경허 스님 시 가운데는 이런 시도 있다.

술도 때론 빛을 내고 색() 또한 마찬가지

탐내고 성내고 번뇌는 영원한 것

부처든 중생이든 그런 것 나는 몰라

일생에 한 일이란 주정뱅이 중노릇뿐이구나.

 

  경허 스님이 머물렀던 천장사에 있는  천장암 

 

경허 스님은 과연 자신의 말대로 '주정뱅이 중노릇'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해인사 시절 경허 스님은 사하촌의 주막에 들러 술을 잔뜩 들이키고 비틀대며 절로 돌아와 그 취한 상태로 대적광전으로 들어가곤 했다. 어느 날 밤, 젊은 스님들은 경허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대적광전에 숨어 지켜보았다고 한다. 대적광전의 부처님 앞에 선 경허 스님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뽑아 들고 자신의 턱밑에 세워 놓았다. 약간이라도 비틀거린다거나 졸면 칼날이 턱을 뚫고 들어갈 판이었다. 그렇게 술 취한 상태로 칼날을 턱밑에 세운 채 곳곳하게 밤을 새웠다고 한다.

 

경허 스님에게는 또 이런 일화가 있다.

경허 스님이 천장암에 있을 때 한 여인을 조실 방으로 들여 같이 먹고 잠을 같이 잤다. 스님들이 발끈하여 경허 스님을 향하여 절을 떠나라고 시위를 했다. 문이 열리자 경허 스님 뒤로 얼굴을 칭칭 동여맨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 여인이 얼굴의 붕대를 풀기 시작하였다. 붕대가 풀리자 문둥병으로 일그러진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경허스님은 문등병이 든 여인과 함께 자며 피고름을 닦아주며 간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인 만공 스님은 "다른 모든 것은 스승인 경허 스님을 흉내 낼 수 있으나 그 같은 일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라고 회상하였다.

 

경허 스님은 천장암에서 당대 선림의 우뚝한 봉우리였던 수월(水月), 혜월(慧月), 월면(月面, 만공) 제자로 삼아 가르쳤다. 천장암 주변에는 해월 스님이 수행했다는 바위 굴이 있다.

 

세수 67. 법랍 59. 1912425. 경허 스님은 함경남도 갑산군 하동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입적하기 전날, 아이들이 서당 마당의 풀을 뽑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며 내일은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게송을 남겼다. 게송이란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양하는 노래를 말한다.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

온 누리의 빛을 머금었구나

그 달빛 온 누리와 함께 사라졌으니

이는 다시 뭘꼬?"

 

스님이 입적한 후 혜월과 만공이 스승의 시신을 운구하여 다비에 모셨는데 당시 스님의 저고리 속에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삼수갑산 깊은 골에

속인도 아니요, 중도 아닌 송경허라

천리 고향 인편이 없어

세상 떠난 슬픈 소식은 흰 구름에 부치노라."

 

첫 번째 게송이 선을 통달한 대선사의 면모를 그대로 반영했다면 두 번째 게송은 누더기옷 한벌로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고통받는 민중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하다가 쓸쓸히 세상 떠난 시인 송경허였다. 이 두 편의 게송에서 볼 수 있듯이 경허 스님에게 있어서 부처와 중생은 한 몸이었다.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바로 부처였던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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