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한국의 명산이다.
그러나 이 산으로 인해 외부와의 왕래가 어려워 산속에 갇혀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인월 사람들이다.
인월면 소재지에는 다른 곳에는 없는 공원이 하나 있다. “역참공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은 고려 초기부터 역이 있었던 자리다. 인월역은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 인월역원이 설치되어 조선 말기까지 약 천 년간 유지되었다.
역참이란 공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교통통신 기관을 말한다.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또 외국 사신 왕래에 따른 환영과 전송 및 접대를 위한 장소이며 공공물자의 운송을 위하여 설치된 교통통신 기관이었다. 이를 우역(郵驛), 또는 역관(驛館)이라고 하였다.
후에 원(元), 참적(站赤) 제도의 영향을 받아 참이 설치됨으로써 역참으로 통용되었다. 역참은 군사 외교면에서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중앙집권적인 사회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육상에는 육참(陸站)을 설치하여 주로 역참이라 하였고 산이나 강변은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였으며 때로는 통행인을 검문하는 관방(關防)의 구실도 하였다.
이곳 인월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써 이미 고려 초기에 인월역원이 설치되어 약 천 년간 유지되었다.

인월역은 고려초기부터 조선 말까지 천여 년을 유지하던 곳이다
역참공원 입구에 안내판과 나란히 서 있는 기념비 하나는 고려의 유명한 문인이었던 백운거사 이규보의 시가 적힌 시비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제9집(卷第九集)에 수록된 고려 문인 이규보(李圭報-1168~1241)의 시다.
이 시에는 인월(引月)의 전 이름이었던 ‘印月’로 되어 있다.
인월역(印月驛)
이규보
어제 밤 비 개니 풀빛도 새로워
높고 낮은 언덕 용 비늘처럼 즐비하네
어찌 일만 오천 보를 걱정하랴
일찍부터 사방으로 돌아다녔네
버드나무는 전송 자주해 낯 익지만
강산은 응당 잦은 왕래 괴이타 하리
눈앞의 풍경을 모두 기억하려 하지만
다른 날 생각하면 묵은 자취 되겠네.
이 시는 이규보가 이곳을 지나가다 인월역에 들려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일만 오천 보를 걸었으니 두어 시간 돌아다닌 것이다. 이규보가 인월에 단단히 반했던 모양이다.

인월 역참공원에 세워진 고려 때의 시인 이규보의 인월역 시비
인월은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북동부에 있는 지역으로 동쪽에는 연비산(843m)과 상산(879m) 등이 경상남도와 경계를 이루며, 남쪽에는 지리산 줄기가 벋어 있다. 서부에는 높이 450m 내외의 산간분지가 발달하여 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 고려말 황산대첩으로 유명한 황산이 있다.
인월면의 남서부에서 유입된 람천이 남동쪽으로 굽어 흘러 낙동강 상류를 이룬다. 산물로는 잣, 산나물, 더덕 등이 많이 나며, 고랭지채소와 과수재배도 활발하다.
인월은 삼한 시대에는 진한에 속하였고 고려 초에는 운봉현 인월역을 설치하였다. 동으로는 함양 방면으로 연결되었고 서쪽으로는 운봉, 남원 방면으로 연결된다. 고려시대에는 남원역의 소속역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오수역(獒樹驛)의 소속 역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역이 폐지될 때까지 천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인월 역참공원에 있는 역참의 상징물
인월 황산은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왜적을 무찌른 황산대첩이 이루어진 곳이다.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영남을 거쳐 북진하던 왜군 장수 아지발도를 황산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과 교접할 때가 그믐날 밤이었다. 그때 이성계 장군이 하늘을 우러러 기원하였다.
“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하여 주소서.”
그랬더니 깜깜한 그믐인데 하늘에 달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이성계의 화살이 적장의 목을 꿰뚫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적장 아지발도가 죽자 기세가 오른 고려군이 왜군을 여지없이 섬멸하였는데 그때 흘린 피가 람천을 붉게 물들였고 바위에 피가 묻어 피바위가 생겨났다.
그로 인하여 그때까지 쓰던 인월(印月)을 지금의 인월(引月)로 바꾼 것이다. 지금의 인월은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려 적을 무찔렀다는 고사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인월에는 흥부대박길이 있다.
인월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효시이며 고전 소설인 흥부전이 태생한 곳이다. 흥부가 태어난 곳이 인월 성산마을이기 때문이다.
흥부와 놀부의 출생지인 인월면 성산마을에서 윗 까막재골 옆 삼림 도로를 넘어가면 흥부가 박을 타서 부자가 된 마을인 봉화산 아래 아영 성리로 연결된다. 이 길을 고난길, 희망길, 고진감래길이라 하여 흥부대박길 14km로 남아 지리산 둘레길로 조성되어 있다.
또 람천 뚝방길을 따라 걸으면서 삼정산을 넘어오는 달을 보면 하늘의 세계를 옮겨놓은 듯한 황홀경에 빠지는데 경애원 뒤에서부터 영월정까지 이어지는 이 길을 달벚꽃길이라 부른다.
인월면 유곡리 성내 마을에는 가야 고분군이 있다. 이는 당시에 가야문화의 영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월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가 서로 다투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인월에는 역사적 흔적을 품고 있는 마을들이 많다.
중군마을: 임진왜란 당시 군대의 규모가 가장 컸던 중군이 주둔하였던 곳
서무: '서무듬'에서 유래되었는데 원래는 '서무덤'이었던 것이 동네 이름으로 무덤이라는 말이 좋지 않아 무듬으로 순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황산대첩에서 섬멸된 왜구의 시체를 풍천 서쪽에 묻었다 하여 '서무듬' 또는 서무라 하였다 한다.
안내판에는 이성계 부대가 주둔하던 서쪽이라 하여 유래되었다고 쓰여 있다.
동무: 황산대첩에서 섬멸된 왜구의 시체를 풍천 동쪽에 묻었다 하여 '동무듬' 또는 동무라 하였다 한다.
안내판에는 고려말 이성계 부대의 동쪽 매복지라고 쓰여 있다.
사창: 구휼미를 비축하던 이성계 부대의 군량미 창고
유곡: 과거 사찰의 유물로 추정되는 대장군석이 있음.
성내: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로써 당시에는 신라에 속해 있었음
상우: 조선시대 군사 주둔지
성산: 임진왜란 당시 조경남 장군 등 8명의 장수가 왜적을 퇴치하던 곳. 팔랑재(513m)가 있음
유물과 유적으로는 백련사 경내에 선종영가집언해(전북 유형문화재 제228호)와 육조대사법보단경(전북 유형문화재 제227호)이 보존되어 있다. 함양군과 연결되는 길목에 있는 팔량치는 예로부터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면의 남서부 일대는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한다. 행정구역은 법정리 기준으로 인월리, 중군리, 서무리, 취암리, 건지리, 유곡리, 상우리, 성산리, 자래리 등 9개리가 있고 행정리 기준으로는 26개 리가 있다. 면적은 37.64㎢이며 인구는 2,700여 명이다.
인월은 경상도로 넘어가는 길목이요,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어서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장터가 생기게 되었다.
인월장은 3일과 8일에 열린다.
지리산에서 나오는 약초와 산나물과 경상도에서 올라온 수산물과 소금이 거래되던 큰 장터였다.
인월장터에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흑돼지, 염소탕, 자라탕, 어죽, 순대국밥, 추어탕, 청국장, 순두부밥 등 별미들이 많다.
오염 걱정 없고 산천이 수려하며 먹을거리 풍부하고 볼 것도 많은 인월은 사람들의 인심 또한 후박하다. 오다가다 들려도 신선이 되는 곳이니 꼭 한 번 들려서 심신을 힐링하고 갈만한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