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의 왜장 아지발도는 고려인이다?

황산대첩에 대한 진실과 허구

작성일 : 2024-06-13 07:31 수정일 : 2024-06-14 10:50 작성자 : 이용만 기자

 

 

 

황산대첩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고려말인 우왕 6년인 13809월에 전라도 운봉에 침범한 왜장 아지발도를 맞아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싸움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때에 지어진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당시 일본은 내분을 겪어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진 일본의 일부 영주들은 무사들을 이끌고 고려나 중국 해안을 침입해 노략질을 하였다.

고려 우왕 6년 왜군이 대선단 500여 척을 몰고 고려에 왔고 진포해전에 이어 황산대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에서는 황산대첩의 아지발도 이야기는 조선에서 꾸며낸 허구한 이야기라고 반박한다. 그 증거로 그토록 외국에 나가서까지 이름을 떨친 용맹한 아지발도에 대한 기록이 일본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일본은 기마병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황산대첩에서 고려군이 노획한 말이 1,600필이나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장 아지발도가 15살의 소년이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겨우 15살에 이 정도의 무술과 지략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지발도가 입었다는 얼굴까지 감싼 철갑에 거대한 창을 휘두르려면 성인 장정도 힘센 장사여야 한다. 15살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대단한 인물이 일본 측 기록에 없다는 것이 허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지발도 부대가 남원 운봉까지 오는 동안에 치른 전투 내력이 없다. 배를 타고 왔으니 운봉까지 오는 동안에 고려군과의 전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투 내력이 없다는 것이다.

 

 남원 운봉에 세워진 황산대첩비

 

황산대첩에서 왜군은 고려군의 10배였다고 했다. 왜군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바위를 적셔 지금도 피바위가 있다. 그 많은 왜군이 운봉까지 어떻게 왔느냐는 것이다. 1380년 왜선 500여 척이 지금의 군산인 진포에 도착하여 진포대첩이 이루어졌는데 최무선 등이 화포를 쏘아 모조리 격침시켰다. 그때 살아남은 왜군은 300여 명에 불과했다. 그 왜군이 다 운봉으로 갔다고 하면 고려군은 겨우 30명 정도여야 한다. 이성계는 당시에 고려군 사령관이었다. 겨우 30명을 끌고 갔을 리가 만무하다.

 

황산대첩은 왜군과의 전투가 아니라 지금까지 지리산에 전해 내려오는 아기 장수 우투리와의 전투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리산 주변에는 아기 장수 우투리에 대한 전설이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 우투리가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반란군을 이성계가 군대를 끌고와 평정을 한 것이다.

황산전투 기록에도 내륙에 흩어져 있던 왜군들이 황산전투에 참여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우투리가 모은 군사였을 것이다.

 

 황산대첩 때에 무수한 왜군의 피로 물든 피바위

 

아지발도는 아마 태조 이성계의 치적을 위하여 허구로 만들어진 인물일 것이다. 아지발도라는 이름이 아기장수 우투리와 발음이 흡사하다. 아지발도는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데 고려사 자체가 역사의 기록측면보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여진 기록이다 보니 여러 면에서 미화되었을 것이다.

 

우투리 설화(說話)는 신분이 미천한 집안에서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아기 장수에 대한 이야기다. 우투리가 미처 성장하여 기량을 발휘하기도 전에 장차 역적이 될 것이라 두려운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내용의 비극적 설화다. 아기 장수 우투리 이야기는 구체적인 내용은 서로 차이가 있지만 전국 각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신분적 한계로 뜻을 펴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지리산 주변의 우투리 설화는 아기 장수인 우투리가 어머니 때문에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는 내용의 설화이다.

 

아기 장수의 우투리 이야기

지리산에서 가난하게 살던 한 부부가 지리산 산신령께 빌어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낳고 탯줄을 자르려고 하니 탯줄이 끊어지지 않아 애를 먹게 되었다. 그때 삼신할머니가 억새풀로 자르라 알려주어 억새풀로 자르니 탯줄이 잘렸다. 아이는 조그마한 날개를 달고 태어난 특별한 아이였다. 그 아이 이름을 우투리라 지었다. 날개를 달고 태어난 이 아이는 곧 영웅이 될 거라는 소문이 고을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를 알게 된 왕은 위협이 될 아이를 잡아오라 하였다. 다행히 아이는 이 위기를 넘긴 후 어머니에게 콩을 가져다 달라고 말하고 이것을 볶아 갑옷을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콩을 볶다가 솥 밖으로 튀어나온 콩을 집어 먹었다. 갑옷을 만드는데 어머니가 주워 먹은 콩만큼이 부족해 날개가 난 부분을 채 가리지 못했다. 후에 우투리를 잡으러 온 군사들이 몰려와 우투리와 싸우게 되는데 콩이 부족해 가리지 못한 곳에 화살을 맞고 우투리는 죽게 되었다.

 

우투리가 죽기 전 부모에게 내가 죽으면 뒷산의 바위 아래 묻고 좁쌀 서 되, 콩 서 되, 팥 서 되를 같이 묻은 후 자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부모는 우투리의 유언대로 그를 바위 아래 묻어주었다.

몇 년 후 우투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문을 들은 왕이 다시 부모를 찾아와 협박하자 이를 이기지 못한 우투리의 부모는 우투리가 묻힌 곳을 알려주었는데 바위만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왕은 바위 속을 의심하게 되고, 바위를 깨뜨리려 하지만 바위는 깨지지 않았다. 우투리의 부모를 다시 잡아 온 왕은 우투리가 태어날 때 이상한 일이 있었는지를 묻게 되고 두려웠던 부모는 우투리와 탯줄 이야기를 왕에게 말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억새풀로 바위를 가르게 하였는데 이 바위 안에 우투리와 함께 묻은 좁쌀, , 팥들이 병사로 변신하고 있었다. 바위가 갈라지고 바람이 불자 우투리와 병사들은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말았다.

 

우투리는 윗몸을 지칭하는데, 여기에서 윗사람, 우두머리라는 의미가 있다이는 새 나라를 세울 영웅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성계로 표상되는 지배층에 대한 반감을 내포하고 있는 이 설화가 조선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전승되었다는 사실은 민중의 저항 의식과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대가 지속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우투리 설화아기장수 설화의 한 유형으로 귀양 간 지리산 설화와 결합되어 전승되기도 하였다. 경상남도 함양, 전라남도 구례, 전북특별자치도 남원 등 지리산 부근에 특히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울떼기 설화'라고도 불린다.

 

황산대첩비는 지금 남원 운봉에 세워져 있는데 전에 세웠던 비는 일제강점기 때에 글자가 쪼아진 상태에서 조각이 나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망가뜨린 황산대첩비를 훼손하여 버린 것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깨지고 훼손된 본래의 황산대첩비

 

우투리 이야기는 하나의 설화다.

조선 건국에 대한 저항 세력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그래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이성계에 대한 반발을 나타낸 이야기인 것으로 보아 황산대첩에서 죽은 아기 장수에 대한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가져보는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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