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의 건국 이념과 통치 철학 담겨 있어
“이거는 아주 중요한 일이니 꼭 기사로 써야 합니다.”
그가 중요하다고 할 정도면 굉장한 기삿거리가 분명하다.
“남원 지리산에 실상사가 있는데 거기 편운화상승탑에 중요한 글자 두 자가 있습니다.”
“나더러 지리산으로 가라고?”
“중요한 기삿거리면 가야지요.”
이 중요한 기삿거리를 제공한 사람은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
“남원 실상사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국립전주박물관으로 가십시오. 거기 실상사 편운화상승탑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모형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정개(正開)’라는 글자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정개에 대한 기사를 쓰십시오. 제가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천 선생 말을 듣고 전주 삼천동에 있는 국립전주박물관을 찾아갔다. 박물관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큼지막한 부도 하나. 그 부도가 천 선생이 말한 중요한 글자 ‘정개(正開)’가 쓰여있는 ‘편운화상승탑’이다.
편운화상의 부도인 것이다.

후백제 연호 ‘정개(正開)'가 쓰여 있는 실상사 편운화상 승탑
편운화상승탑에는 희미하지만 알아볼 수 있는 한자로 된 글자 스물넉 자가 쓰여 있다.
편운화상승탑(片雲和尙 僧塔)에 쓰여 있는 글자
創造 洪陟 弟子 (창조 홍척 제자)
- 실상사를 창건한 조사 홍척의 제자
安峰 創造 片雲和尙 浮屠 (안봉 창조 편운화상 부도)
- 안봉사를 창건한 편운화상의 부도
正開 十年 庚午 歲建 (정개 10년 경오 세건)
= 정개 10년 경오년에 세운다.

편운화상 승탑에 새겨진 정개를 포함한 스물넉 자의 글자
안내판에는 “남원 실상사에 있는 편운화상승탑에 ‘정개 경오년에 승탑을 세웠다’라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개는 후백제 견훤의 연호이며 편운화상은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연 홍척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편운화상승탑으로 후백제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자료다.”라고 쓰여 있다.
“정개(正開)”
이는 견훤이 900년에 나라를 세우고 901년부터 사용하여 왔던 후백제의 연호다.
연호(年號)란 중국의 황제만이 쓸 수 있는 말이었다. 견훤이 후백제의 기원을 “정개(正開)”라 칭한 것은 자신이 세운 나라가 온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웅대한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후백제의 연호 정개가 뚜렷한 편운화상 승탑의 글자
연호의 시작은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중국의 한무제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제정하면서 연호기년법이 시작되었다.
중국의 연호는 중국을 넘어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나라에까지 사용이 강요되었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중국 황제에게 대적하는 반역의 의미로 해석되어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견훤이 후배제를 건국하고 연호를 정개라 한 것은 의미가 크고 깊다.
신라에서도 쓰지 않던 연호를 쓴 것은 신라보다 더 강하고 큰 나라를 만들어 황제로 군립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후에 태봉의 궁예도 연호를 썼는데 의미는 다른 정개(政開)를 썼다.
대한민국은 1948년 9월 25일에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공용연호를 단군기원으로 한다."라고 명시하였고, 1961년 12월 1일에 법을 개정하여 연호를 단군기원에서 서력기원으로 바꾸었다.
견훤이 백제를 다시 세우게 된 이유와 사명이 ‘정개’에 들어 있다.
정개(正開)란 '바른 세상을 연다' 또는 '세상을 바르게 연다'는 뜻으로 후백제의 건국이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정개(正開)는 올바름으로 새로운 나라의 출현을 선포해 ’올바른 세상‘이 시작되게 하며 이를 위해 바르지 않은 나라와 세상을 징벌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는데 바르지 않은 나라는 당시의 신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나라가 취해야 할 백제나 고구려인에 대한 통합적, 융합적 통치에 대응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자국 백성으로 끌어안지 못하고 차별 대우함으로써 반발이 오래 지속되었다. 특히 백제 유민들이 신라 통일 후 100년이 넘도록 저항을 계속한 것은 그들에 대한 융합을 끌어내지 못하였다는 증거다.
신라 말기에 가서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견훤과 궁예가 등장한 것도 필연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견훤과 궁예가 모두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붕괴시킨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감을 부각하였으며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에 대한 차별에 대한 불만 해소를 현실적 목표로 제기하였다.
견훤은 신라 사회의 골품제적 한계와 정복 지역에 대한 가혹한 수탈 등 신라가 통일된 국가를 운영할 새로운 체계와 방식을 구축하지 못하고 기존 방식을 고수하며 한계를 노출하자 백제 부흥을 통해 새로운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여 호응을 얻게 되었다.

후삼국 시대의 후백제, 후고구려, 신라의 세력도
정개 속에는 백제 재건에 대한 정통성이 들어 있다.
견훤은 백제야말로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마한(馬韓)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마한은 고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우리 민족의 정통이라는 것이다.
고조선의 준왕은 고조선을 크게 부흥시킨 왕이다. 서쪽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고조선의 서쪽을 지키게 했는데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고조선울 무너뜨리고 위만조선을 세우자 남쪽 마한 땅으로 내려와 한(韓)나라를 세우고 한왕(韓王)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고조선을 이어받은 정통은 마한(馬韓)의 한(韓)나라라는 것이다. 위만은 중국의 한(漢)나라 족속임으로 고조선의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도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진한이나 변한이 후에 일어났으며 백제는 마한을 이어받은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이다.
900년 후백제를 공식으로 출범시킨 견훤왕은 901년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하고, 오월(吳越), 당, 거란, 왜 등 여러 나라와 주체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정개(正開)’연호는 2022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된 남원지역 실상사의 ‘편운화상승탑(片雲和尙僧塔)’에 표시되어 있다.
견훤이 서기 900년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우고 제시한 첫 번째 발언이 ’국가의 정통성‘ 문제를 제시하였다. 이는 국가 건립 명분의 첫 선언으로 그 역사적 명분을 ’정통성 회복‘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견훤은 자신의 후백제 건국의 명분으로 삼국의 시초는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후에 진한, 변한이 일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견훤은 역사 정통성의 제시와 고조선-마한-백제-후백제로 이어지는 정통성의 회복으로서 백제 부흥의 명분으로 제시하였다. 이 같은 내용은 935년 견훤의 아들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발표한 즉위교서에서도 “쇠퇴해 가는 말세를 만났으나 천하를 다스릴 것을 자임하였고, 삼한(三韓) 땅을 차지하여 백제를 부흥하겠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견훤왕은 쇠퇴한 말세의 어려운 시기를 회복하는 것은 역사 정통성의 뿌리인 마한을 이은 백제의 부흥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명분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제기한 고조선의 정통을 마한이 계승하였다는 정통론적 인식과 현재의 대한민국의 국호 ’대한(大韓)‘의 뿌리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견훤의 마한-백제 인식 표명은 고조선 준왕-마한-백제-후백제로 연결된 정통성 논리에 근거하여 제시한 것이었다.
견훤이 왕이 아닌 대왕으로 칭하였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견훤왕은 927년 신라를 공략해 경순왕을 옹립한 이후 자신을 신라 제후국 왕을 책봉한 ‘대왕(大王)’으로 위상을 격상시켜 명실상부한 후삼국 통일 대왕으로 자리매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일본 측 사료 내용을 보면 전주를 다녀온 진자경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전주왕(全州王)인 견훤은 수십여 주를 병탄하여 대왕(大王)이라 칭하고 있다. 장잠망통(長岑望通)등이 전주에 이르렀을 때 견훤왕이 기뻐하며 자리를 마련하여 환대하였다.”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쓰고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를 쓰며 큰 나라를 이루어 황제(皇帝)가 되고자 했던 견훤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37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큰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는 말이 생각나는 역사의 한 흔적이다. 견훤이 집안 단속을 잘하여 신검과 금강 사이에 집안싸움을 하지 않았고 견훤이 계속하여 집권을 하였더라면 후백제의 역사는 좀 더 긴 역사를 이어 갔을 것이고 전주의 영광도 오래 지속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