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도(獒樹道) 오수역참(獒樹驛站) 유적지인 오수역참지 비
“형님, 임실 오수 근방에서 살았다 했죠?”
“그렇지. 임실 삼계니까 오수 부근이지”
“그럼 남원역도 관할하던 오수역참을 아나요?”
“으잉? 그렇게 큰 역참이 오수에 있었다고?”
남원 인월까지 가서 인월역에 대한 기사는 썼으면서도 인월역을 관할하던 오수역을 모르고 있었으니 등잔 밑이 어두워도 한참 어두울 일이다.
수시로 옆구리 찔러 정신 차리게 해준 사람은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
오수는 예로부터 호남 동부지역 교통의 요지였다.
기차가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는 오수역은 임실역보다 더 많은 사람이 왕래를 하는 큰 역이었다. 특급열차도 오수역에서는 쉬어가야 할만큼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수는 사통팔달의 교통중심지로 오수가 자리 잡고 있는 둔남은 물론이고 임실군 성수, 삼계, 지사를 비롯하여 장수 산서, 순창 동계, 남원 덕과, 보절, 사매가 오수를 생활권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오수군’을 만들자고 할 때도 있었다.
오수역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오수는 고려시대부터 역참(驛站)과 원(院)이 설치된 곳으로 사람과 물산의 교류가 활발하여 인근 지역을 둘 아우르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시대 오수역은 남원도(南原道) 창활역(昌活驛) 관할 12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찰방사가 있는 오수도(獒樹道)가 되어 남원역이 관할 구역으로 들어오게 되고 오수도의 수역으로서 남원과 곡성, 구례, 광양, 순천, 여수 등 11개 역을 관할하는 큰 역이 되었다.

천여 년 전부터 있었던 오수역참을 기념하는 오수역참지 비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21년(1439) 오수역승(獒樹驛丞)을 두었다.
그 후 세조 3년(1457)에는 정역 찰방(程驛察訪)을 파견하였으며, 세조 8년(1462)에는 병조 소속 외관직인 문관 종6품 찰방을 두었다.
오수역이 관할하는 역에는 남원의 동도, 응령, 창활, 운봉의 인월, 곡성의 지신, 구례의 잔수, 광양의 익신, 섬거, 순천의 낙수와 양율, 여수의 덕양 등 11개 역이었다. 오수역은 한양에서 590리, 전라감영에서 90리, 남원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며, 가장 멀리 떨어진 광양의 섬거역까지는 240리였다.
역원은 왕명의 전달,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과 지대, 관물과 진상 등의 물품 운반, 관원 사행시 숙박 및 마필 공급, 통행인 검문, 죄인 체포압송 등의 역할을 하였으며, 호남읍지 남원부(1872) 오수역조에는 역리(驛吏) 727명, 역노(驛奴) 178명, 역비(驛婢) 42명이었고, 역마(驛馬) 15필, 복호(復戶) 322결, 보인(保人) 322명, 보솔(保率) 161명, 일수(日守) 10명, 인호(人戶)는 360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수역참에서 근무하는 사람에게 내렸던 오수도 찰방 교첩
이토록 교통의 요지였던 오수역참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신식 우정 제도의 도입과 1931년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역참으로써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오수역참과 관련된 기록은 현재 오수양로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양로청선생안(養老廳先生案)』과 『양로안(養老案)』, 『양로안 절목(養老案節目)』을 중심으로 오수양로당의 건립과 변천사에 기록이 되어 있다.
1712년 오수역의 찰방(察訪) 최주하(崔柱夏)가 설치한 양로청(養老廳)은 1712년에 만들어져 1895년까지 존속되었다.
양로청에 회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오수역의 역리를 지낸 영이방(令吏房)과 부이방(副吏房)을 역임한 사람들인데 나이가 회갑을 지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1895년 조선의 역 제도가 폐지되어 양로청의 규약이 유지될 수 없게 되자 1914년 규약을 개정하여 역리를 지내지 않은 일반 사람들로 61세 이상 노인으로 학대하였는데 김해김씨 삼파(三派)의 후손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양로청 선생안』과 『양로안』에 기재된 성씨를 살펴보면 『양로청 선생안』에는 각 시기별 영이방과 부이방을 지낸 144명이 수록되어 있고, 『양로안』에 217명이 수록되어 있다. 『양로청 선생안』과 『양로안』에 수록된 217명 중에서 195명이 김해김씨로, 약 89%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권씨, 박씨, 백씨, 조씨, 이씨, 진씨, 지씨 등 12개 성씨는 22명이 있었다.
오수역 역리(驛吏)는 대부분은 김해김씨 삼파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거주하는 김해김씨는 삼현파로서 매헌종중(梅軒宗中)이라고도 하는데 매헌(梅軒) 김기손(金驥孫)을 입향조로 삼고 있다. 김기손 등 김해김씨는 무오사화(1498) 이후 낙향하였다가 오수역의 역리를 세습하였다. 사화와 연루되어 처벌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역리로 정속(定屬)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지도서』(1659)와 『호남읍지』(1872)에 의하면, 오수역의 편호는 약 360호이고 오수역의 역리를 포함한 노비, 일수 등을 모두 합한 인원은 1,440명이었다.
임실군에서는 이처럼 예로부터 호남 동쪽의 교통의 요지였던 오수역참을 기리기 위해 2015년에 민간 차원에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오수역참지 비 건립을 추진한 결과 2년 후인 2017년에 오수역참지 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오수역참지 비 개막식 사진
오수역참지 비는 상석과 하석으로 구성됐으며, 가로 220cm와 세로 190cm, 폭 60cm의 크기로 옛 역참 터인 오수상인회주차장 부지에 설치되어 있다.
역참지 비문 제자(題字)는 우리 고장 오촌마을 출신으로 오수역장을 역임한 중수 박태규 선생이 썼다. 그는 오수연서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국전에서 대상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어 보관해 오던 "찰방 최주하 선정비"(숙종 34년(1708), 숙종 38년(1712)도 같이 다시 세웠다.
이제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옛 역참터에 오수역참지(獒樹驛站址) 표지석을 세우게 되었으니 번성했던 오수의 한때를 회상하면서 오수역참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