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전주동초등학교 뒷산인 종광대 지역이 재개발된다는 것 아시나요?”
“알지.”
“그거 개발될 것 같아요, 안 될 것 같아요?”
“이번에는 쉬운 문제를 내네. 그거야 결국은 개발되고 말지. 다른 데도 그러더구만.”
“땡! 이번에는 안 될 겁니다. 유물은 발굴하여 박물관으로 옮기면 되는데 토성이 나왔는데 땅덩어리를 어떻게 옮겨요.”
“으잉! 그럼 또 틀린 거야.”
한 번도 이겨 먹을 수가 없는 그 사람은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
전주의 동쪽, 전주동초등학교 부근을 물왕멀이라 부른다.
이곳의 길은 견훤로, 견훤왕궁로, 물왕멀길 등 왕(王)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이곳은 견훤이 서기 900년에 전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궁궐터로 삼았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땅을 파면 후백제 유물이나 유적이 나온다.
최근에 전주동초등학교 뒷 언덕인 종광대 부근에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일단은 종광대 언덕에서부터 터를 닦아가는데 후백제 유물이 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130m에 달하는 토성이 나온 것이다. 유물이야 발굴하여 옮기면 되지만 유적은 특성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개발에는 심각한 장애가 된다.
모든 건설 사업은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면 스톱된다.

후백제 유물과 유적이 나와 개발 중지된 종광대 언덕
이에 따라 지난해 문화재 발굴조사단이 검증한 결과 후백제 때 축조된 130m 길이의 토성과 기와 등이 발견됐다. 이로 인하여 인후동 종광대 2지구의 재개발 사업은 일단 중단을 했다.
그리고 국가유산청은 심의위원회를 열고 종광대 재개발 터의 ‘조건부 현지 보존’ 결정을 내렸다.
이번 결정에 따라 전주시는 보상대책협의회를 구성한 뒤 보상자문위원회 등 절차를 거쳐 보상기준을 정할 계획이다. 보상액은 1천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종광대 2구역 재개발은 전주시 인후동 1가 31,243㎡의 주택 등을 철거하고 지하 3층∼지상 15층 규모의 공동주택 530세대 건립을 주축으로 추진되어 왔다. 재개발 조합에는 190여 명이 가입되어 있는 상태다.
전북지역 역사학자, 고고학 연구자 등 80여 명은 성명을 통해, 국가유산청과 전주시가 후백제 유적이 다수 발굴된 종광대 재개발 구역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재개발 구역에서 발견된 도성벽이 현재 전주시에서 유일하게 남은 후백제 도성 유산으로 판단되는 등 역사적 가치가 높다며 보전과 발굴 등을 위해 민·관·학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지역 정치권에는 후백제 유산 보전을 위한 국가 예산 확보 등을 요구했다.
국가유산청이 전주 종광대 2구역 재개발 사업 구역에서 확인된 후백제 시기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유물에 대해 보완 발굴조사를 주문했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주시에 이런 내용의 전주 종광대 2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부지 내 유적 전문가 검토회의 조치사항을 통보했다.
발굴조사가 미흡하다고 보아 보완 조사를 통해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는 취지다.
아직은 국가유산청으로부터 상세한 내용이 전달되지 않아 단언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이쯤 되면 주택 재개발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지명은 왕과 관련된 것이 많다
물왕멀.
이곳은 전주의 실제적인 주산인 승암산 줄기를 따라 기린봉을 거쳐 전주 중심부를 향해 벋어 나온 산줄기 중 반태산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이 부근은 길들이 물왕멀길과 반태산길이다.
이곳 바로 옆길은 서낭댕이 고갯길이다.
전주에서 서낭댕이 고개라고 하면 이곳을 말하는데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과 완산구 노송동 사이에 있는 물왕멀 고개에 있다. 전주고등학교를 지나 전주동초등학교로 올라가는 길목이 서낭당 고갯길이다.
지금 전주 서낭댕이에 있는 성황사는 승암산 북쪽 견훤의 왕궁터가 있던 동고산성 안에 있었으나 고려 신종 2년인 1199년 전주목사록겸장서기로 부임한 이규보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기린봉 북쪽, 현 서낭댕이 부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중종 14년인 1515년에 곤지산으로 옮겼다가 숙종 14년인 1688년에 견훤왕 성 안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종광대에서 발견된 후백제 시대 토성의 흔적
서낭당에서 서쪽으로 난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전주동초등학교 정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솟아있는 언덕이 종광대(鐘廣臺)다.
종광대는 학동들을 가르쳐서 밝게 하는 곳이라 하여 동광대(童光臺)라고도 불렀다.
종광대는 후백제 시대에 이 곳에 종이 있었던 자리다. 후에 그 곳에 대를 지었는데, 그 대의 이름이 종광대라고 한다.
종광대 주변의 마을이 물왕멀이다.
종광대 아래의 물왕멀이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앞부분은 남쪽 들판을 바라보고 뒤쪽은 북쪽 바람을 막아주어 산성으로서 지리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엔 전주이씨들이 살았던 곳이며 일제강점기 때에 동정리라 불렸던 곳이다.
물왕멀은 본래 물왕말이라 불렀다.
‘말’은 오래전부터 마을을 나타내는 말로 마을의 준말이다.
지금 국어사전에서도 ‘마을의 준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은 수왕촌(水王村)이라고도 불렀다.
물왕말은 왕이 마셨던 우물이 있었던 곳으로 물왕멀, 무랑물, 무랑말, 물왕물, 수왕촌(村) 등으로 불린다. 본래 물왕말이었던 것이 전해져 오다보니 '물왕물', '물왕멀'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견훤은 물왈멀에 궁성을 짓고 둘레에 토성을 쌓아 수도로 정비하려 했다.
물왕말 앞은 전주고등학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모두 논이었으며, 인봉리 방죽의 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전주의 동부지역이 대부분 기린봉 산자락들이 벋어내려 넓은 들판이 없었는데 물왕멀 지역은 비교적 넓은 경작지를 확보하고 있어서 산물이 넉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본래 성씨가 이씨였는데 후백제를 세운 후 전주 견씨로 바꾸어 전주 견씨의 시조가 되었다.
견훤은 이 물왕멀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궁궐을 지어 도읍으로서 방비를 튼튼히 했으며, 궁궐 둘레를 성곽을 쌓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북쪽 맞은편 언덕 수승대에 거북바위를 놓아 전주의 북쪽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전영래 원광대 교수는 ‘전주(全州)·동고산성 개괄 조사보고서’에서 고토성(古土城)은 전주부 북오리(全州府北五里)에 있다 하였는데 이곳이 견훤도성(甄萱都城)의 외성(外城)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전주부사(全州부史, 1943년 발행)에서는 전주부 북오리(全州府北五里) 지점을 현 전주시청 노송동(老松洞) 물왕말(水王村)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전주역(현 전주시청) 동(東) 반태산(盤台山, 속칭 반태미)의 구릉지는 후백제 견훤왕궁지로 보아도 대과(大過)가 없으며 또 승암산(僧岩山) 남동방 성황사 소재(南東方 城皇祠 所在) 산곡(山谷)의 성지가 동왕궁(同王宮)에 가장 인접한 산성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후백제 왕궁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해서는 전주역 동쪽(현 전주시청 동쪽), 고산가도(高山街道, 전주 중앙성당에서 코아백화점 옆으로 해서 전주농고 앞을 지나 고산에 이르는 도로)와 구(舊) 동정리에 통하는 도로(전주고교 동편에서 서낭댕이를 거쳐 진안으로 가는 도로)의 중간에 낀 일련의 구릉지대는 고래(古來)로 후백제왕 견훤이 쌓은 토성지로 전해져 왔고, 특히 이곳은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곳에서 출토된 연화문화당도 그 물증으로 볼 수 있고, 이 지역이 전주의 고성지(古城址) 중 가장 형승지(形勝地)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대의 민가를 자세히 조사한 결과 왕고(往古)의 왕성의 건축초석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각형석재(角形石材)나 대형천석(大形川石)이 무려 일 만여 개가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전영래 교수는 왕궁을 중심으로 관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은 전주부사에서 지적한 대로 전주고등학교에서 반태산에 이르는 중노송동 일대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1930년대에 건물 초석 1만여 개가 널려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나 신라식 연화문와당이 출토됐다는 점으로도 짐작이 간다고 하였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고토성재부북오리(古土城在府北五里) 유기지(有基址) 견훤소책(甄萱所策)이라 한 것도 이곳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책 사조조에 여단지 북오리라 했는데, 이 여단지가 바로 반태산이므로 이 고성지는 반태산 일대임을 알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물왕말'을 포함한 반태산, 전주고교, 전주동초등학교가 있는 일대가 견훤성이었고 중심부가 궁성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종광대 2구역 주택재개발 지역에서 후백제 도성벽 북벽(동-서로 길이 130m, 너비 10~14m, 잔존 성벽 높이 2.5m)이 확인됐다. 성벽은 구시가지 북동쪽 해발 60여m 구릉에 있으며, 시내 조망에 좋은 지형 조건이다.
학계와 일부 시민사회단체는 종광대 2구역에서 후백제 도성벽 존재와 축조공법 등이 파악된 것을 근거로 현지 보존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후백제는 아쉽게도 937년에 멸망한다.
궁궐도 도성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37년 만에 망하고 만다.
후백제가 370년쯤 이어갔더라면 전주가 수도로써의 구색을 완전히 갖추었을 터인데 아깝고 아쉽다.
후백제가 망하자 전주 사람들은 배를 타고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는 중국 남쪽 지역에 전주라는 도시를 만든다.
중국 광서성 장족자치구 백제허에 있는 전주.
중국의 전주는 광서성에 속해 있는 전주현이다. ‘취안저우’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전주(全州)라고 쓴다.
중국의 전주에는 한국의 전주에 있는 지명들이 그대로 있다.
완산이 있고 가련산이 있고 금산사가 있고 발산이 있다. 송광사가 있는 종남산이 있고 원등사가 있는 청량산이 있다. 문수산과 방장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진안의 주자천, 정자천, 안천, 등이 중국에도 있다. 진안 주천면에 있는 무이동은 중국 주자의 무이동과 같다. 그래서 중국의 주자의 후손들이 전북 진안 주천면의 무이동을 다녀갔다고도 한다.
중국 전주의 완산(完山)은 전주의 동남쪽 강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과 남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세 줄기의 물줄기가 상강으로 합류되는 지점에 있는 산이다.
중국의 가련산은 중국 전주의 남동쪽 고원지대에 솟아있는 제법 높은 산이다. 그 옆에는 사자산이 있다.
중국 금산사는 전주의 금산사처럼 전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한때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중국의 발산은 중국 완산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의 이름이다. 전주에는 승암산 줄기의 오목대와 연결된 산이 발산이다.
우리나라에서 전주라는 이름은 완산이라 불리던 것을 757년에 전주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중국의 전주는 937년 상원이라 불리던 곳을 전주로 바꾸었다. 중국의 전주는 한국의 전주보다 무려 180년이나 늦다. 한국의 전주 사람들이 중국에 건너가서 만든 도시이기 때문이다.
천년고도를 부르짖는 전주가 후백제 도성, 왕궁지 등 유산 보존이 매우 중요하다. 후백제의 도성과 왕궁지로 추정되는 중노송동과 인후동에 재개발이 시행되면 이 지역의 유산은 멸실 될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또 이곳은 후백제를 상징하며 수많은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 곳이므로 보존이 마땅하고, 발굴된 도성벽은 현재 전주시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후백제 도성 유산으로 만약 이곳이 훼손되면 후백제의 소중한 유적지 하나가 사라질 것이다. 이는 전주시가 추진하는 ‘왕의 궁원 프로젝트’와도 역행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