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명의 직공을 거느렸던 오수견업주식회사
임실군 오수에는 지금 바라보아도 끝이 아득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공장 굴뚝이 하나 있다. 한 때는 직공이 2,000여 명에 이르는 방대한 제사공장인 오수견업주식회사가 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부터 장려해오던 잠업이 점차 성행해지자 주변의 누에고치들을 수거하여 실로 뽑아내는 제사공장이 오수에 생긴 것이다.
오수는 오수장을 중심으로 오수면을 둘러싸고 있는 임실군 성수면, 지사면, 삼계면은 물론이고 장수군 산서면, 남원의 덕과면과 사매면, 순창군 동계면까지 아우르는 생활 중심지였고 임실읍과 맞먹는 큰 고을이었다. 지역 조건으로 보아 주변의 지역에서 들어오는 누에고치를 모아 실로 빼내는 일을 하는 제사공장이 성공할만한 곳이었다.
제사공장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곳이며 누에 기르기의 장려로 제사공장이 많이 생겨났다. 이때 공장에서 나온 다량의 번데기가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서민들의 식품으로 이용되면서 대중적인 음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아이스케이크와 더불어 “뻔, 뻔이요, 뻔데기!”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식용으로 사용하였던 번데기는 누에나방에서 나오는 번데기를 말하는데 곤충 중에는 알에서 애벌레로 성장하여 번데기과정을 거쳐 나방이 되는 완전변태를 하는 것이 있는데 누에나방은 완전변태를 하는 것으로 그 번데기가 식용으로 사용되는 특별한 식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사공장이 들어선 것은 1912년 송병준이 일본 오구치구미와 합동으로 행촌동에 설치한 “대성잠사부”였다. 그 후 대구에 세 개의 제사공장이 세워짐으로써 대구가 섬유도시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제사공장들은 대부분 문을 닫게 되었고 현재의 번데기는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오수에서 오래 살았다는 윤강희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 2천여 명이나 되는 직공들이 공장을 드나들어 늘 북적대었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 직공들이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 시끄러웠다고 한다.
화장실 몇 개를 쓰다 보니 늘 화장실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으며 대변은 화장실에 가서 보되 소변은 아무 곳이나 울타리 밑에다 보아 공장 울타리를 끼고 살고 있던 자기 집은 늘 지린내가 진동했다고 한다. 오수에서는 방을 얻을 수가 없어 그런 곳이라도 감지덕지 살아야 했다고 한다.
시골에서 잠을 설쳐가며 누에치기를 해봤자 몇 푼 되지도 않지만 오수 공장에 와서 일을 하면 상당한 월급을 받았으므로 시골 아가씨들이 그야말로 호미자루 내던지고 오수 공장으로 달려왔고 공장 직원 되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힘입어 한때는 오수군을 만들자고 까지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옛날의 영화는 어디로 가고 연기도 없는 메마른 굴뚝만 쓸쓸하게 그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