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고개 위를 맴도는 진안 출신 구름재 박병순

우리말 우리글에 바친 일생

작성일 : 2021-08-18 04:24 수정일 : 2021-08-18 09:15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선비의 풍모와 기상을 지닌 사람

 

단아한 선비의 풍모와 올곧은 자세로 일생을 살아간 구름재 박병순 선생.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림새가 단정했고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평소에도 자태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이 조용하고 점잖았으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공손하고 온화했다. 그래서 누구나 좋아했고 거리에 나서면 그를 반기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는 인정의 샘이었다. 퍼내어도, 퍼내어도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이었다.

 

글도 우리나라의 정형시인 시조를 썼고 다른 영역을 넘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한국전쟁으로 가람 이병기 선생이 전북에 내려와 전북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 직접 문하생으로 들어가 시조를 배우고 익혔고 그의 뒤를 이어 시조 발전을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이다.

 

시조를 종교로 삼은 사람

 

그는 우리의 고유한 글자인 한글과 우리의 고유 문학인 시조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평생을 이를 위해 일했다. ‘시조를 종교로 삼은 사람’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가람 이병기 선생이었고 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평생을 시조의 물결 속에서 살다 갔다.

 

그의 시조 사랑은 이미 1952년 전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전문지 『신조(新調)』를 발간하여 보급시켰고, 이 문집은 5집까지 발간하였는데 그때까지 구름재 선생이 주관하였다. 그리고 본인의 시조집을 1956년에 『낙수첩』, 1971년 『별빛처럼』, 2003년 『먼 길 바라기』 등 12권을 상재하였다. 이외에 『우리 시조 큰 사전』을 공동으로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시조를 통하여 아름답고 정겨운 우리말 우리글을 다듬어 나가는데 힘썼다. 이러한 공로로 세종대왕 기념관에서 거행된 한글학회 기념 100돌 기념식 때에 한글운동 공로자로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술집에서 심부름하던 아이의 이름이 ‘옥자’인 것을 알고 ‘구슬 아기’로 고쳐 불러주기도 하였다.

 

그는 문학의 장르 중에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살리는 시조에만 전념하였고 작품 속에서도 우리글을 아름답게 살려 쓰는데 힘썼다. 대부분 호를 지을 때에 한자어를 사용하는데 그의 호가 순 한글인 ‘구름재’인 것만 보아도 그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는 대구사범을 다닐 때부터 시조 사랑이 시작되었다. 당시 항일학생 운동에 참가하여 일경에 잡혀가 고문을 받기도 했는데 죄목이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시조집을 들고 다니며 전달한 죄였다.

 

가람 선생과의 인연

 

구름재 선생과 가람 선생과의 인연은 특별하다.

처음 가람 선생을 만난 것이 전북대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것인데 그 후 가람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는 가람 선생을 통하여 시조를 배웠고 시조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모하는 마음이 계속 이어졌다.

그의 작품 가운데 이런 시조가 있다.

 

잔을 거우르니

환영이 떠오른다.

 

추석날 아침에

홀로 앉아 마신다던

 

그 잔을

벌써 잊은 듯

호젓하실 스승님

 

 

하늘은 더욱 맑고

코스모스 피는 철에

 

일렁이는 가슴

차마 어찌 지내신고

 

들었던

잔을 놓으며

한숨짓는 이 아침

 

두 번째 시집 『별빛처럼』 가운데 「추석날 아침」이라는 시조다. 이 작품에는 ‘스승님 앞에’ 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스승님은 바로 가람 이병기 선생을 일컫는 것이다. 이때는 가람 선생이 서울로 가셔서 가까이 모시지 못하는 때였기에 명절을 맞아 술을 한 잔 마시려다 스승님 생각이 난 것이다. 가람 선생에 대한 시는 여러 편이 있다.

그는 오로지 시조에 전념했는데 가람 선생에 대해서 쓴 수필도 있다. 그의 친필 원고에 「술과 가람」이라는 글이 있다.

 

가람은 술복을 자랑하셔 가는 곳마다 술을 즐겼다.

어딜 가나 사흘이면 단골집이 생기고 술맛만 좋으면 시장 한 복판도 마다 아니하셨다. 집에서는 사모님 정성으로 사철 술이 끊이지 않았다. 봄 두견주, 여름 매실주, 가을 국화주, 겨울 송진주……(중간 생략)

술 익자 벗님네 불러 그 풍류를 누리셨다. 충청도 조화, 목포 삼학, 군산 백화를 좋아하셔 술병만 보면 술상 독촉 발발하시어, 잔 들면 만면에 웃음꽃 피는 황홀경에 들었다. 관에 들려 취흥이 돋으면 음담패설로 흥성였어도 끝나면 반듯이 걸어 뒤돌아보질 않으셨고, 아무리 취해도 평생토록 이튿날 결근이 없으셨다.

술을 무척 좋아하시되 술에 빠지지 않으셨고 술 끝에 넘어져서 바람(풍)에 맞았으되 숨지기 전 날 점심 반주까지 술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회갑 기념 문집 『구름재 시조선집』

 

그가 회갑이 되던 해인 1977년 11월에 회갑기념으로 낸 『구름재 시조선집』에는 이백 편 가까운 시조가 실려 있다. 머리말에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의 글이 있고 표지의 책이름은 서예가 김충현이 써주었다. 그리고 강암 송성용이 기념 휘호를 써주었으며 김해강이 축시를 썼다. 책의 뒤편에는 백철과 장순하, 천이두 등의 이름 있는 문인들이 작품에 대한 평을 했다. 특이하게 간행 후기가 있는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쓴 것이다.

이 책은 혼자서 낸 것이 아니라 ‘구름재 시조선집 간행위원회’가 만들어져 편집을 했는데 중앙대 교수였던 문학박사 황희영을 비롯하여 19명의 문인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구름재의 작품세계

 

그는 우리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했기에 그의 작품에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많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의 곧은 성품과 인정이 듬뿍 묻어 있다.

 

총총히 먼 길을 떠난 지 하마 보름도 넘었는데

네 뚫고 간 문구멍을 아직도 막지 않은 뜻은

그 구멍 너머 귄이 쪽쪽 흐르던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아침저녁 선들거리고 비바람 사납게 부는 날도

네 뚫고 간 문 구멍을 상기도 막지 않은 뜻은

고 구멍 넘어 정이 찰찰 넘치던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문을 바르기 전에」 부분

 

이 시에 나오는 문구멍은 단순히 문에 뚫린 구멍에 그치지 않고 그가 살아온 생애에 대한 생활이요 사상이요 철학이라 할 것이다. 시인이요 교육자로서의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그를 알고 있는 지인들에 대한 사랑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친필 원고를 보면 원고지 끝장에 글을 쓴 해와 날짜와 시간을 적었는데 서기가 아닌 단기로 적었고 글을 쓰기 시작한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을 자세히 적었다.

「초록 고향 천리 길」을 보면, 4337년 4월 20일, 낮 1시 반 ~ 4시 50분이라고 쓰여 있고 다시 21일 하오 3시 반 ~ 6시 58분. 그리고 22일 아침 8시 37분 ~ 12시 56분이라고 쓰여 있다. 시조 한 편을 썼는데 다음 날과 그 다음 날에 다시 고쳐 썼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시간도 분까지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다른 친필 원고인 외로운 밥상 잔치, 당신은 말이 없고, 남이섬 갈매기, 술과 가람에도 이렇게 시를 쓴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다. 결코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쓰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라 할 것이다. 평소의 생활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선비의 지조는 글을 쓰는데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내 생애 아무리 서럽고 괴로웠대도

임종만큼은 저 낙조처럼 고와야지……

저녁 놀 헤치고 깜박 숨지는 황홀 황홀한 저 한 점

 

구름 흩어지며 산산조각이 나도

서녘 하늘은 마지막 거룩한 잠자리

낙조는 빈 하늘 한 가닥 서광으로 남는다

 

                                                                    「낙조처럼」 전문

 

그가 위장병을 앓고 난 후에 쓴 글이다. 위의 시를 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회고와 사유를 통한 삶의 자세가 묘사되어 있다. 이제 나이도 들고 몸에 병도 오니 살아온 생애와 죽음에 대한 사유가 시작된 것이다.

시조 시인이요 교사로 살았던 구름재 선생의 시정신은 인간과 자연을 자연스럽게 결합한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결코 흩어짐이 없었던 그의 철저한 생활 태도는 작품 하나하나에도 허투루 대하지 않았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순수성을 바탕으로 한 무한한 사랑의 표출이었다.

 

탄생 100주년 기념 생가 복원

 

전주에서 진안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곰티재를 넘으면 길 양쪽으로 메타세쿼이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길가에 진안이 낳은 시조 시인 구름재 박병순 선생의 생가가 있다.

 

 

그는 진안에서 태어나 진안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을 졸업할 때까지 진안 생가에서 살았다. 전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러 학교를 거쳐 고향인 진안공고에 내려와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진안군에서는 구름재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생가를 복원하고 선생을 기리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여 진안이 나은 시조시인을 기렸다.

 

그의 비명(碑銘)에는 그의 생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무거운 책보따리를 들고 허우대던 불우한 국어 국문 학도였다. 그러나 한글 전용의 선구자요, 실천자요, 공헌자였고, 시조 전문지의 효시 ‘신조(新調)의 주재자로 시조 문학 부흥과 시조 보급 운동의 거점을 이룬 끈질기고 과감한 투쟁자였다. 한글을 사랑하고 시조를 종교 삼는 민족 시인으로 가람의 뒤를 이은 한국의 별로 살다 간 가냘프고 고달픈 순결한 대한의 교육자였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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