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연극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
예향의 고장에 한몫을 한 연극 활동
전북이 예향의 고장이라는 것은 비단 문학에서 만의 공로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한 점이 많다.
그중에 하나가 연극이다. 전북의 연극은 박동화라는 걸쭉한 연극인이 있었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전북의 연극 발전을 위해 일했고 전북의 연극을 위해 살다가 마지막까지 연극 공연을 보면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연극은 종합예술이다. 많은 분야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골격이 되는 것은 대본이 있는 희곡이다.
희곡은 극작가에 의해 쓰인다. 그러기에 문학사에서 희곡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박동화는 연극을 직접 실연하고 연출한 연극인이면서 수많은 연극 대본을 만들어낸 극작가이다. 전북지역의 연극이 다른 지역보다 창작극이 많았던 것은 박동화가 만들어낸 희곡에 힘입은 것이라 할 것이다.
전북지역에서 처음으로 연극의 막이 오른 것은 1961년이었다. 그해에 전주극장과 이리 삼남극장에서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한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공연되었다. 전북 연극사에 길이 기록될 중요한 해였다.
박동화와 전북의 인연
연극인 박동화는 전북 태생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전북을 사랑하는 전북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전남이지만 활동을 한 곳은 전북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연극인생을 거의 전북에서 보냈다.
박동화의 본명은 박덕삼이다. 그는 1911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중학생 시절인 1928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게 되자 서울로 올라가 조선연극협회 회원으로 연극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극작과 연출 수업을 받았다. 그 후 귀국하여 신문사 지국장을 하기도 하고 신문사 편집국장을 맞기도 하였다. 그는 시와 수필과 평론 등을 집필하면서 문학적인 소양을 길러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 연극을 위한 보조 활동이라 할 것이다.
박동화가 전북에서 연극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56년 전북대학교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당시의 전북대학교 총장이었던 김두헌이 그를 편집국장으로 스카우트해 오면서 전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전북대학교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때에는 전셋집에서 살만큼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가 본명인 박덕삼에서 박동화라는 이름을 쓴 것은 1936년에 ‘수전노’라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사용한 이름이다. 다음 해에는 박동화라는 이름으로 ‘수해 후’라 하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가 희곡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9년 국립극장에서 모집한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당선된 후부터였다.
이 작품은 국립극단에 의해 공연되었고 1961년 전북대학교 극예술연구회에 의해 공연이 되었으며, 1968년 최호영이 연출한 창작극회에 의해 재공연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는 박동화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전북지역의 연극을 위하여 헌신했다. 그는 1961년 극단 "창작극회"를 창단한 이후 매년 2편 정도의 희곡을 써서 연출을 하였다. 20년 동안 40여 편의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니 희곡작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쓴 것이다.
그가 명예를 생각했다면 중앙으로 진출하여 활동을 했을 것이고 훨씬 높은 명성도 얻었을 것이다. 그의 재능이나 열정으로 보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한 번 발붙인 전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전북지역에서 연극 활동을 하는 동안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는 그 탈출구로 전북의 연극단을 이끌고 서울로 가서 국립극장에서 열린 전국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였다. 거기에서 자기의 희곡 「두 주막」을 공연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의 연극에 대한 재능과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박동화의 연극 인생
박동화는 70년대 말까지 20여 년 넘게 오직 연극만을 위해 삶을 바쳤다. 대학에서 극예술을 익힌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문극단인 창작극회를 발족시킨 이도 그다. 연극인 양성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고, 창작극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연극판의 성격도 정립을 시켰다. 희곡작가가 넉넉하지 않은 현실에서도 창작극이 유달리 많은 곳이 전북 연극단이었다. 그러한 그의 공로는 한국연극협회 전북지부장을 초대에서 7대에 이르기까지 수행하였으며 전북예총의 수장을 겸하기도 했다.
1973년은 그가 회갑을 맞는 해였다. 그해에 그가 쓰고 연출한 ‘산천’이 무대에 막을 올렸다. 이 연극은 도내 미술인들이 전시회를 열어 제작비를 지원하여 이루어진 연극이었다. 이 연극이 공연된 사흘 동안에 객석이 가득 차서 전북에서 애쓰고 수고한 그에게 화답을 하였다. 또한 최선 무용단이 찬조 출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북 연극계는 활발한 활동이 이어졌는데 그해에 박경창 작, 문치상 연출의 ‘버드나무촌’이 전국 새마을 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1974년에는 박동화 작, 신상만 연출의 ‘생수’가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1975년에도 ‘농촌 봉사대’가 동상을 받게 되어 전북지역 연극단의 수상은 전국 무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는 오로지 전북지역에서의 연극부흥을 위해 몸 바쳐 온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가 죽기 전에 그는 후배이자 제자인 문치상에게 후배들을 부탁한다며 남긴 말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나는 행복한 게야. 연극인은 무대에서 살다 무대에서 죽은 것 아닌가. 후회는 없네. 다만 연극을 맘 편히 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그리고 평소에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는 후배들을 위해 길 닦음 노릇만 해 주면 되네. 연극으로는 먹고살지 못하니까 쓸 만하면 다 서울로 떠나지 않는가? 그들이 이 고장을 지킬 수 있도록 도립극단이나 시립극단도 만들고, 소극장도 있어야 돼. 참 나 말이야 죽거든 절대 화장하지 못하게 하게나? 난 죽어서도 연극을 해야 되니까."
그는 1978년 6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전북 최초로 ‘문화예술인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전북 연극사가 좀 더 빛을 발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