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의 왕은 하늘이었다.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어느 누구도 왕의 명을 거역하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왕의 행적은 곧 역사였다.
왕이 지나가기만 해도 그곳은 역사에 남을 장소가 되었다.
하물며 하룻밤을 쉬어 간다면 그곳은 아주 중요한 장소로 남고 명승지가 되었다.
왕은 여러 곳에 별궁을 마련하여 두었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유사시에 대비하고 휴양 차 언제 그곳에 갈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지어놓은 것이다.
조선시대 행궁이 전북에는 네 개가 있었다.
전주의 경기전이 하나요, 격포 행궁, 무주 무풍 행궁, 완주 동상의 위봉산성 행궁이었다.
이번 취재는 그동안 소식이 뜸했던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이 침묵을 깨고 제보해 준 것이다.
1. 무주 무풍 명례궁터
명례궁터는 명성황후의 99칸 별궁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전라북도 무주군 고도2길 33번지에 위치해 있다.
명례궁은 조선 후기 궁내 대신 민병석이 건립한 행궁으로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한 별궁이다.
민병석은 무풍 지역을 무릉도원의 땅이요 십승지지의 하나인 난세의 피난지로 여기고 이곳에 99칸의 건물을 지었다.

무주 무풍에 있는 조선시대의 별궁이었던 명례궁 터 안내문
명례궁 터는 대덕산 장터의 북쪽 뒤편에 자리한다.
현재 명례궁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명례궁 터로 추정되는 대부분의 지역은 민가로 조성되어 있으며 일부 지역은 감나무가 식재되어 있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밭 주변에서는 정원석으로 추정되는 석재와 거칠게 다듬어진 석재도 일부 확인된다.
후에 명례궁 건축 목재 일부는 대덕산 정각으로 옮겨갔고 일부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지서 건물로 팔려 갔다,
건물 1채는 경북 김천시 부항면에 옮겨져 보존 중이며 일부는 헐렸다. 현재는 행궁의 터를 알리는 안내판만 있다.

현재 경북 김천시 부항면에 있는 무풍 명례궁의 일부
2. 완주 위봉산성(完州 威鳳山城) 행궁
위봉산성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뒷산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인 숙종 원년인 1675부터 시작하여 숙종 8년인 1682에 완성한 포곡식 산성이다.
현재 사적 제4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봉산성은 근방의 산을 둘러싼 형태로, 둘레는 약 16km 정도이다.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위봉산성
건립 목적이 다른 산성과는 좀 특이하다.
산성은 본래 전쟁이 나거나 변고가 발생했을 때 주민을 보호하고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위봉산성은 특수한 목적이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이는 바로 전주에 있는 경기전에 위험이 발생했을 때, 경기전에 모시고 있는 이성계의 영정과 위패를 본 산성으로 옮겨와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동학 농민군에게 전주부성이 함락되었을 때 태조의 영정, 위패 등을 이 산성으로 옮기기도 했었다.

위봉산성의 일부인 서문 부근의 산성
위봉산성 안에는 초상화와 위패를 모실 소형 궁전을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헐려지고 없다. 본래 성의 동쪽, 서쪽, 북쪽에 각각 문을 냈는데, 지금은 전주로 통하는 서쪽에 반월형 서문 하나만 남아 있다. 성안에는 위봉사와 전주 팔경의 하나인 위봉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성문의 옆으로는 도로가 나 있으며, 장대나 비석 등은 파괴되거나 훼손된 상태다.
관련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성벽 및 성문, 포루, 여장, 총안, 암문 등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격포행궁(格浦行宮)
격포행궁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행궁으로 '부안행궁(扶安行宮)'이라고도 한다.
다른 행궁들과는 달리 지금은 존재 자체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1640년(인조 18년)에 전라관찰사 원두표(元斗杓)가 건립을 요청하여 세운 행궁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부안에 설치된 전라우수영 관하 격포진(格浦鎭)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여지도서》나 《호남읍지》 등 문헌과 〈부안격포도형변산좌우도〉라는 지도에도 그 위치만 표시되었을 뿐, 규모나 형태에 대한 세부 정보가 기록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격포행궁을 건립한 데에는 병자호란이 영향을 미쳤다. 전부터 격포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아 진을 설치했다.
『경종실록』에 의하면 격포진에 대해 전라감사 강이장이 ‘강화도와 거리가 심히 멀지 않으므로, 강화도에서 거처를 옮기게 된다면 이곳 격포가 상륙 지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검영(檢營)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강화도의 배후를 지원할 기지로 격포진을 주목, 강화도와 마찬가지로 부안에도 행궁을 지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실록》에는 1754년(영조 30년)에 호남 지역의 어사로 나갔다 돌아온 홍자(洪梓)가 보고서를 올린 것이 있다.
격포 행궁(格浦行宮)을 설치한 것은 장차 나라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행궁의 담 밖은 텅 빈 채 백성의 마을이나 창고의 저축이 하나도 없다며 격포의 폐기된 둑을 보수하고, 이어서 행궁의 둔전(屯田)을 만들어 백성을 모아 경작하게 하며 그 대가로 세금을 거두자고 주장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격포진이 설치된 뒤에도. 계속 폐지와 재설치하기를 반복했던 점으로 보아, 격포진이 과연 전략적으로 가치가 충분한지를 두고 조선시대에도 논란이 심했던 듯하다. 격포진이 철폐된 이후 부안의 전략적 위치도 하락해 행궁의 가치도 함께 쇠락한 것이다.
4. 경기전(慶基殿)
경기전은 전주 한옥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사적 제3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기 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종 10년인 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에는 전주, 경주, 평양에 어진 봉양 처를 만들어 어용전이라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眞展)이라 하였다가 세종 24년인 1442년에 전주는 경기 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각각 칭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태조 진전으로는 경기전이 유일하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행궁, 경기전
경기 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되었다. 경기 전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신성함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외신문, 내신문 그리고 어진을 모신 정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의 사당이었으므로 신문(神門)이라고 호칭되며 홍살문 안쪽 내·외 신문의 세 문을 통과할 땐 동쪽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와야 한다. 가운데는 태조의 혼령이 드나드는 ‘신도’이기 때문이다.
경기 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함께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경기 전에 사고가 설치된 것은 1439년(세종 21년)의 일이다. 경내에는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 전(유형문화재)과 그의 22대 조이며 전주 이 씨의 시조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肇慶廟)가 있다. 특히 태조 어진(국보)과 함께 현존하는 조선왕조 어진들이 모셔진 어진박물관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경기전에 있는 태조 어진
전북에 있었던 행궁은 현재 경기전만 남아 있고 3곳은 소실되어 없다.
하루빨리 복원하여 문화적 가치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