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鄭汝立, 1546~1589).
그는 반역자인가, 혁명가인가?
정여립은 정갑록에 나오는 정도령이 되려고 했는가?
정여립이 그때 죽지 않았으면 임진왜란 때 어떤 활동을 했을 것인가?
우리 전북 출신 인물 가운데 정여립만큼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정여립공원”을 안 가볼 수가 없다.
정여립 공원은 완주군 상관면 신리에 있다.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가는 사람이 있으면 더 좋다. 동행해 준 사람은 김성하 시인.

완주군 상관면 신리에 있는 정여립 공원
정여립 공원은 규모가 작다.
외진 곳이어서 사람들의 왕래도 뜸하다.
그러나 여기에 오면 정여립이라는 사람이 작은 사람이 아니라 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천하공물(天下公物).
그때 당시에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로마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타난 예수님과 같은 주장이다. 그도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말았다.

정여립 공원에 가면 '천하공물'을 주장한 정여립을 만날 수 있다.
정여립은 선각자요, 선지자다.
홍문관 수찬으로 활동했던 정여립이 나라를 다스리는 조정의 관리들과 선조 임금에게 실망을 느낀 나머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김제 금구로 내려와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大同)에서 ‘동(同)’은 한 장막 안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뜻을 같이 한다.”는 뜻이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해 그 세력을 키워가고 있을 당시, 다음과 같은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호남 전주 지방에 성인이 일어나서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다. 그때는 수륙(水陸)의 조례와 일족, 이웃의 오열과 도피자 색출 등을 모두 감면할 것이고, 공․사천과 서얼(庶孼)을 금고(禁錮)하는 법을 모두 혁제(革除)할 것이니, 이로부터 국가가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
이 말은 곧 백제 멸망 이후 금산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미륵의 세상’ ‘민중의 나라’에 거는 민중들의 염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정여립 공원에 가면 정여립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는 많은 사람이 가입되어 있었다.
그들은 매달 보름(十五)날 한 번씩 회합하여 글도 배우고 활쏘기, 말 타는 법, 칼과 창 쓰는 법도 배웠다. 사람은 글만 배워도 안 되며 무술도 알아야 한다고 하여, 매월 모일 때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서 활쏘기 시합을 하여 무술을 연마하였던 것이다. 이때 정여립의 본가에서는 주육과 음식을 많이 준비하여 그들을 배불리 먹였다고 한다.
그 부근의 부자들도 정여립이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유성룡이 술회하였던 것처럼 정여립은 멀리서 조정까지 움직일 만큼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죽도 선생이라고 하면 부근의 어린아이들까지 한푼 두푼 기부할 정도였으며, 재산이 많은 어느 과부가 재산을 팔아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정여립의 신분 타파에 대한 열망, 곧 일반 백성들과도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 정여립의 대동계에 물밀듯 밀려왔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반역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을만했고 기축옥사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황해도에서의 투고로 말미암아 엄청난 살육이 시작되었던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에서 일어난 3건의 다른 옥사에서 희생된 사람보다 훨씬 많은 1,000여 명에 이른다. 전라도 인재들이 무수히 사라진 사건이다.
정여립이 마지막으로 죽게 된 죽도는 상류에서 바라보면 입구 쪽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보이지만 들어가는 쪽에서는 상류 쪽이 보이지 않는다.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서 탐관오리를 징벌하려고 건설하였던 이상향이 율도국이었고, 허생전의 이상향도 섬이었던 것처럼 이곳 역시 섬 아닌 섬으로 요새 중의 요새였다.

정여립이 죽음을 맞이한 진안 죽도
1589년, 10월 기축옥사 때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그의 일행들과 함께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에 의해 정여립은 의문사를 당했고, 기축옥사라는 피바람이 조선의 산천을 휘젓고 지나가면서 조선의 알토란 같은 지식인들이 천여 명이 죽어 나갔다.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삼 년 전이었다.
당시에 세력을 잡고 있었던 서인들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만들어 동인들을 대상으로 전례 없는 피비린내 나는 살인극을 벌였다. 그때 희생된 사람들이 무려 1,000여 명.
이런 일을 주도했던 정철은 아무리 국문학사에서 좋은 작품을 남겼다 하더라도 정치사에서는 나쁜 전례를 남겼다. 그는 결코 양심적인 사람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선비도 아닌 당파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전주시 덕진구에 '정언신로'라는 도로명이 있다.
‘정언신로’는 후백제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전주동초등학교 뒤에서부터 시작되어 아중리 동부 우회도로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정언신로’는 정여립 모반 사건에서 가장 피해를 본 전주 출신 정언신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도로명이다.
그는 당시에 우의정으로써 정여립 사건을 조사하는 위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여립과 9촌 친척이라는 이유로 위관에서 물러나고 정철이 위관으로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감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정언신이 삭탈되자 무인(武人)들이 한숨짓고 개탄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심임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그는 1566년 명종 21년 별시 문과에 병과 제13인으로 급제하였다. 1571년에는 전라도 도사를 지내고 이후에는 사헌부에서 경력을 쌓다가 1579년 경기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582년 여진족 니탕개가 니탕개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선조는 정언신을 우참찬으로 승진시키며 함경도 도순찰사를 겸직시키며 정언신에게 니탕개의 난을 진압할 것을 명했다. 이에 정언신은 당시의 명장이었던 신립, 이일, 이순신, 김시민, 이억기 등의 장수들을 이끌고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병사를 주둔시켰다. 선조는 난을 진압한 정언신을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했다. 1587년 병조판서를 거쳐 1588년에는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589년에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정언신이 사망하자 이항복은 몰래 찾아가 관 속에 만인시(挽人詩)를 지어 넣어 애도의 뜻을 표했고, 선조도 그의 죽음을 후회하고 사후 복권을 시켜주었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에 대하여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 황정욱은 "정언신이 있었으면 왜적에 이렇게 짓밟히지는 않았을 것."라고 탄식했으며, 류성룡도 징비록에서 임란 시기에 그가 없음을 아쉬워했다.
비록 정언신은 억울하게 얽혀 죽었지만, 완전히 집안 자체가 풍비박산이 난 것은 아니고 후에 복권되어 손자 정세규가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자손만대에까지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정여립이 죽고 난 3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정여립이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이끌고 있었던 대동계 사람들이 의병이 되어 왜군을 격퇴했을 것이다. 어쩌면 남원에 ‘만인의 총’이 생겨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정여립.
어쨌든 그는 아까운 사람이다.